주일 미사에 신자들이 가득합니다. 미사 시작 전 모든 신자가 합송하는 묵주기도의 운율이 성당의 공간을 채우고, 건물과 저에게도 온몸으로 함께 진동합니다. 성당의 절반 이상은 어린 학생들로 차 있고 그들이 목청껏 부르는 성가의 맑은 울림은 천국에 울려 퍼지는 천사의 합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당 문밖 한편에는 미사가 익숙한 듯 다섯 마리의 개가 배를 깔고 앉아, 눈을 감고 미사 시간 내내 자리를 지킵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방글라데시 청년의 소개로 방글라데시 북부 마이덴싱 교구의 한 가톨릭 신자 마을을 찾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무슬림 국가에서 한 민족 전체가 가톨릭 신자로 살면서 사제, 수도자는 물론 주교님까지 배출한 ‘가로족’이라는 소수 원주민 공동체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아이들이 가득하고 그들이 건네는 환영의 꽃과 춤은 환대에 익숙하지 못한 도시민에게 송구함이 넘치게 합니다. 마당 한 편에 서 있는 나무에서 바로 수확하여 내놓은 코코넛과 망고의 신선함이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무슬림이 90% 이상인 이슬람 국가, 세계의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 기후 변화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나라 등 온통 부정적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나라에서 이처럼 활기찬 교회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도 못 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곳에는 ‘성 빈센트 드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파견한 한국인 수녀님 두 분이 진료소를 운영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고 계셨습니다.
어둠이 내린 마을 길을 걷다 보면 선명한 불빛의 반딧불이 담장 사이로 흐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별과 은하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따로 없습니다. 어두워지면 쉬고 밝아지면 일하는 리듬을 잃어버린 도시인에게 이곳에서의 며칠은 자연의 리듬을 일깨워 주는 피정과도 같았습니다. 그분들은 만날 때마다 ‘우리는 드릴 게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자연과 우주, 공동체로서의 삶, 맑은 찬송의 감동, 피조물과 함께하는 미사 등 많은 것을 일깨워 준 시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연과 그 질서를 희생시키는 발전을 통해 물질적인 풍요를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소중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생태적’이라는 말조차 잃어버린 영적 공허감을 채우려는 부유한 자의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비록 물질적인 풍요함은 없더라도 그곳에서 경험한 넘쳐나는 우주적 사랑의 기쁨은 재화로 얻을 수 없는 충만함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창조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따라 서로 보살피는 마음으로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기쁨과 생태적 치유가 되어 줍니다. ‘해외 원조 주일’을 지내며, 일방적 베풂의 의미가 강한 ‘원조’라는 단어를 다르게 써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글 | 홍태희 스테파노(하늘땅물벗 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