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정의 열풍’을 일으켰던 마 이클 샌델이 새로운 책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또 한 번 한국사회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 제목에는 ‘공정’이라는 주제가 부각되었는데, 사실 책의 원래 제목 (The Tyranny of Merit, 능력주의의 횡포)에서는 ‘능력주의’가 핵심 주제입니다. 한국어 번역 책에서도 이점을 의식하여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부제를 덧붙였습니다.
이 책에서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를 집중적으로 비판합니다. 능력주의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는 이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직접 관련 이 없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조건이 아니라 오로지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결과가 결정되는 것이 공정하다는 판단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학연, 지연, 가족, 친인척, 권력 등에 따른 특혜 비리 사건들이 드러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 은 상실감과 분노를 느끼며 오로지 본인의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결과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과연 능력주의는 공정할까요? 마이클 샌델은 책에 서 미국 사회의 여러 현실 모습을 예로 들면서 능력주의가 결코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합니 다. 책을 읽다보면 마이클 샌델이 마치 한국을 예로 들고 있 다는 착각을 느낄 정도로 능력주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현 실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 책의 제목 이 암시하듯이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능력주의 문제는 개인의 능력 형성 과정이 현실적으로 공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능력주의의 공 정함이 성립되려면 기회의 공정함, 즉 기회의 평등이 먼저 갖추어져야 합니다.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고, 능력에 따른 경쟁의 출발선이 같아야 합 니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서 기회와 조건은 결코 모두에게 공정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금수저, 아빠·엄마 찬스, 기울어진 운동장 등의 말이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 니다.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지나친 경쟁주의, 승자독식의 상황입니다. 능력만이 절대적 기준이 되면서 능력으로 인정 받기 위한 지나친 경쟁이 사회를 지배하고, 결과적으로 현실의 삶이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살벌한 정글이 되어버린 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치명적인 문제는 승자 의 우월의식과 패자의 자기비하의식입니다. 경쟁의 승자는 결과를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 정당화합니다. 문제는 이런 정당화가 승자의 우월의식과 오만함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경쟁에 뒤처진 사람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 없이 그들의 상황을 단지 노력하지 않은 자의 당연한 결과로 간주합니다.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은 스스로 패배자로 인식하면서 자신에 대한 열등의식과 비하감을 지니게 되고, 삶 자체를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결국 능력주의는 공정한 세상 실현을 내세우지만 현실적으 로는 오히려 불공정한 사회, 사람들 사이의 차별과 갈등이 심각한 사회를 더욱 심화시키고 내재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정한 세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을까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가능성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020년 10월 4일에 회칙 『모든 형제들』을 발표하면서 경제·사회·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오늘날 세상의 도 전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현대 세상의 문제를 ‘배제와 차별’이라는 문제의식으로 분석합니다.
‘경제적 이익, 사회적 계층, 문화적 다름, 정서적 감수성 등 의 요소가 사람과 사람을 편 가르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이 익과 관심을 극단화하면서 자기중심적 원을 그어놓고 계속 해서 다른 사람들을 원 밖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점점 더 작고 예리한 파편들로 쪼개고 사람들을 파편화된 각자의 세상 안으로 분리시킨다는 점이 현대 세상 문제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지적하는 이러한 현실 모습은 능력주의에 따른 문제 상황과 서로 연결됩니다. 능력주의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건 교황님이 지적하는 배제와 차별의 문제 상황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상 황에서 사람들은 오만한 자기우월의식에 빠진 승자와 자기 비하의 패배의식에 빠진 패자로 파편화됩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이러한 문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 제시한 ‘착한 사마리안’의 영성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파 편화된 세상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로 인해 위험에 내몰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관심, 그리고 자비의 실천이 절실합니다. 그것은 바로 ‘한 형제로서 모두와의 연대’입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만의 존재일 수 없습니다. 한 형제로서 모두 와 연대 안에서 인간은 온전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한 형제로 연대된 세상이 하느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은 분명 현실 삶을 위하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한 형제로서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나의 노력과 능력이 궁극적으로 한 형제인 모두를 위한 것으로 방향을 지닐 때 승자-패자의 배제와 차별이 없는 공정한 세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오지섭 사도요한(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