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노마드’라는 생경한 용어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 니다. 어느 순간 일상으로 스며든 인터넷 세상에 우왕좌 왕 할 즈음, 디지털 장비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시공간의 제약 없이 정착하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을 목축을 하며 떠돌아 살던 유목민에 비유한 말이었습니다. 경영인들에 게는 징기스칸을 배우는 붐이 일었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이동해야 한다고 재촉받았습니다. 해묵은 관행 에서 안정을 찾던 이들에게 유목민 정신은 확실히 해방 감과 역동성을 주었지만, 머물러 살아가는 이들만이 가 질 수 있는 책임감은 뒤로 밀렸습니다.
교회가 박해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약탈과 전쟁이 횡행하 던 불안한 시대에는 많은 은수자들이 동굴을 찾거나 이 리저리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자들 을 한 장소에 모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정주하는 공동 체를 세웠습니다. 지역에서 주민들과 함께 땅을 돌보고 산업을 일으키며 하느님을 찬양한 정신은 지금도 책임감 있는 생태 정신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부자가 된 교회를 성찰하며 복음의 가난을 살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탁발을 실천한 프란치스코 성인이 나타나셨습니다. 늑대와 새 등 동물과 교감하며 해ㆍ달ㆍ별 및 모든 자연을 형제며 누이라고 부르셨던 성인은 오늘 날 생태론의 귀감이자 주보성인이 되셨습니다. 한 분은 머물 것을 다른 한 분은 비울 것을 주장하셨지만, 정주와 탁발, 책임감과 자기 비움으로 대표되는 두 성인의 정신 이 서로 모순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다른 듯 서로 보완하며 통하는 절묘한 조화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교회가 전통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생태 사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구온난화, 생명 다양성 위기 등 당면한 생태문제에 대하여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획일적 해결책은 없다고 강조하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이 생각납니 다. 베네딕토 성인과 프란치스코 성인이 지향한 삶의 태도는 달랐지만 피조물과 친밀한 관계 맺음을 통해 하느 님을 찬미하려는 영성은 같은 본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 이제 따르는 제자들도 생겼습니다. 고향 주변 마을인 카나에서 열린 혼인잔치에 제자들과 함께 들렸던 예수님은 잔치에 술이 떨어졌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습니다. 물은 일상을 위해 항상 있는 것이지만 술은 특별한 날을 위해 준비하 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일꾼들에게 물을 항아리에 붓도록 하고 잔치 손님을 위해 퍼서 나르자 그것은 포도주였다고 전합니다. 서로 쓰이는 곳은 다르지만 물 과 포도주가 같은 항아리에서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었 습니다.
물만으로는 기쁨을 나누기 부족하고 포도주만으로는 물 을 대신할 수 없듯이 일상과 특별함이 교차되는 다양한 계기를 통해 적절하게 세상을 창조하고 기르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하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생태 영성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글 홍태희(하늘땅물벗 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