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소서, 임마누엘”(가톨릭 성가 93번)은 대림 시기의 마지막 두 주일에 많이 불리어서 우리 귀에 익숙한 성가입니다. 대림 시기 성가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이 성가는 더욱 잔잔하고 구슬프며 설움과 탄식이 묻어납니다. 작사자와 작곡자가 밝혀지지 않은 이 오래된 성가는 8세기 무렵부터 유럽의 수도자들을 통해 구전되기 시작했다는데, 원문 라틴어 가사에는 이런 정서가 더욱 깊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외로운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당신께서 내리시는 새날의 기운으로 우리를 견디게 하소서. 깊은 밤의 우울한 구름을 흩으시고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쫓아내소서. 당신의 아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뻐합시다, 기뻐합시다, 어서 오소서 임마누엘” 언젠가 오실 메시아에 대한 한줄기 희망을 품고 기나긴 포로 생활을 견디어 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산한 세월이 가사 속에 이렇듯 절절합니다.
내용을 좀 더 곰곰이 살펴보면 의미가 더 새롭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히브리어 임마누엘(עִמָּנוּאֵל)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이란 뜻입니다. 앞뒤 단락과 함께 풀어 보면, “늘 함께 계시는 주님, 어서 오소서”란 뜻으로 다소 모순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믿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고달프고 외로운 포로의 삶을 살면서도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의 끝에는 천둥처럼 등장하여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고된 삶을 끝장내어 줄 메시아, 구세주가 있었습니다.
포로 생활이 끝나고 이제는 제국 로마의 식민치하에 사는 서러운 백성들에게 마침내 그 구세주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대로 위엄 있고 웅장한 제왕의 모습이 아닌 발가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칭얼대고 보채는 연약한 생명으로 왔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혼전 임신으로 남의 눈에 곱지 못했을 가난한 부부에게 태어난 이 갓난쟁이 메시아는 냄새나는 여물통에 누워 첫 숨을 쉬었습니다. 아기의 앞날은 더 암울합니다. 그는 부모를 따라 이방 민족의 땅에서 난민이 되어 유년을 보낼 것이며(마태 2,13-15),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어미의 마음을 예리한 칼에 찔린 듯 아프게 할 것입니다(루카 2,34-35). 그뿐이 아닙니다. 고난의 때가 오면 그의 몰골은 사람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질 것이며(이사 52,14), 멸시와 퇴박을 당하며 모두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것입니다(이사 53,3).
상서로운 별빛을 따라 수십 리를 여행하여 아기를 찾아온 동방 박사들은 아마도 아기 앞에 놓인 척박한 길을 짐작했을 것입니다. 제왕을 위한 선물인 황금을, 제사장을 위한 선물인 유향을, 메시아를 위한 선물인 몰약을 낙타에 싣고 사막을 건너오는 그들의 여행길엔 어쩌면 깊은 침묵이 깔려 있었을지 모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섭리에 대한 경외와, 아기가 감당해야 할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제 눈앞으로 다가온 구원에 대한 기대, 이 복잡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담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아기 앞에 당도한 이 이방의 현자들은 선하디 선한 어미와 아비의 품에 안겨 있는 운명의 아기에게 제왕과 제사장과 메시아에게나 합당한 예를 올립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립니다.
오매불망 메시아가 올 날을 기다리며 의롭게 살던 예언자 시메온 영감도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어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해 성전에 온 이 딱한 아기를 만났습니다. 기다림이 준 지혜였을까요, 영감은 아기를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아기 앞에 놓인 척박한 운명 또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영감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기꺼이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0).
동방 박사들과 시메온 영감이 본 구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물통에서 태어나 십자가에 달려 죽을 고난의 종의 운명을 타고난 아기에게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본질을 내어 세상에 보낸 이 어린 아기는 사랑을 위해 태어났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 끝내 사랑할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위해 가장 낮고 고단한 삶들 한가운데로 들어갈 것이고, 그들이 토해내는 시름과 탄식을 자신의 숨으로 들이키며 임마누엘을 일깨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단 한순간도 그들을, 우리를 버린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릴 것입니다. 그가 선포할 구원은 하느님의 그 오래고 깊고 질긴 사랑에 우리가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되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운명의 아기는 그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 어린 아기가 오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아직 고개를 가누지도 못한 채, 밤톨만한 주먹을 꼭 쥐고, 아기는 평온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 작은 생명체는 곧 자라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할 것입니다.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온정이 닿지 않는 춥고 외진 곳의 생명들에게 갈 것입니다. 역병의 세상에서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일터를 잃은 이들에게로, 전쟁과 기후 재난과 가난으로 고향을 떠나 이웃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난민들에게로, 고립된 채 우리의 눈길에서 멀어져 가는 독거노인들에게로,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성 소수자들에게로, 그는 임마누엘을 알리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발길이 닿는 곳마다 우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 같이,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지 않겠소?”(요한 13,34 참조).
글 l 조민아 마리아(조지타운 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