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쯤인가 내가 70살, 80살이 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60년, 70년 후의 나?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아주 멀고 먼 훗날의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지나더니 이제는 그토록 멀게 보였던 그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했던 초등학생 때가 훨씬 더 아련하게 느껴집니다.
다가오고 지나가 버리는 시간. “우리, 시간 내서 한번 만날까.”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을 틀린 말입니다. 공간은 건축물로 바꾸어 만들 수는 있지만, 사람은 결코 시간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은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 손이 묶인 것처럼(束手) 어찌할 도리가 없어 꼼짝 못 합니다(無策).
그래서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끝을 알려 주소서. 제가 살날이 얼마인지 알려 주소서”(시편 39,5). 주님께서 ‘몇 뼘 길이’로 정하신 인간의 살날은 ‘한낱 입김’처럼 짧고 ‘한낱 그림자’처럼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좋아, 오래전 대학의 제 연구실 책상 앞에 일하다가도 언제나 잘 볼 수 있게 적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너무 급박하게 들릴 때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린 적이 많았습니다. 흘러가는 세월의 허무함을 쉽게 수긍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기말고사, 모의고사, 입학시험 등 참 많은 시험을 보며 살았습니다. 그런 데다가 일생을 교수로 산 제게는 때가 되면 학생들에게 시험 문제를 내고 성적으로 매기는 일이 늘 있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한두 시간이고, 문제는 늘 남아 있는 시간 안에서만 풀 수 있는 법. 그래서 시험 치는 학생들은 묻습니다. “시간 얼마 남았나요?” 그러면 저는 남은 시간을 친절하게 알려 주었지요. “15분 남았다.”, “10분 남았다.” 시간이 다 되면 저는 학생들의 시험지를 걷었습니다.
그런 제가 인생의 시험 시간에 “시간 얼마 남았나요?” 하며 주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님은 침묵하실 뿐 “7년 남았다. 16년 남았다.”라고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몇 뼘 길이’의 시간을 살고 있다고 깨달으며 현재를 살 뿐입니다.
이번에도 주님께서는 새해를 허락해 ‘몇 뼘 길이’에 불과한 인생의 시험 시간을 조금 연장해 주십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집착과 욕망을 버리고 그분께 희망을 걸고 감사하며 사는 것밖에요. “그러나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 39,8).
글 |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