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사회 안팎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성찰’(省察)입니다. 대형사고를 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잘 나가다 미끄러진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스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애용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평생을 두고 깊이 성찰하고 자숙하겠습니다.” 저 역시 성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데, 진정한 의미도 잘 모르면서 ‘있어 보이는’ 용어라 여겨져 애용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습니다.
‘성찰’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언행과 지난 삶을 천천히 돌아보고 깊이 살핌’입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그 의미가 한결 풍요로워집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 선 한 나약한 인간 존재로서, 자기 생각과 말, 영혼과 육체의 상태,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깊이 반성하며, 가슴을 치고, 그래서 다시금 주님 안에 새롭게 시작하려는 일련의 노력’을 성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성찰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전개되지 않으면 무조건 남의 탓, 나라 탓, 세상의 탓으로 돌립니다.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옵니다. 성찰하지 않는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성찰은 진정한 기도로 나아가기 위한 첫 관문입니다. 기도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진지한 성찰을 습관화하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는 다양한 측면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에 대한 진지한 성찰, 내가 소속된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의 실상에 대한 뼈를 깎는 성찰, 교회 공동체,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한 고뇌에 찬 성찰,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
기도 생활 안에서 성찰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합니다. “성찰은 기도 중에 경험하는 깨어있는 마음 상태이며, 이러한 마음 챙김은 기도로 충만한 상태와 동일한 것입니다. 온전히 성찰할 때 나의 기도는 온전한 기도가 됩니다. 분심이 많이 들수록 기도는 고갈됩니다. 끝내는 기도가 공허하고 형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분심 때문에 성찰이 깨지면 기도는 그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다비드 슈타인들라스트, 『감사』, 분도출판사)
진지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집중력과 경이로움과 단순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더욱 수월하게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보다 편안하게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글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