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건물로 막혀 있는 도시에서 매일 1분이라도 저녁노을을 관조하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일레인 세인트 제임스의 책 《Simplify Your Life》은 ‘인생을 복잡하게 살지 않는 100가지 방법’ 중 83번째 방법으로 저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잠깐만이라도 저녁노을을 보노라면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아 보인다.”
요즘과 같은 코로나19 시기에 저는 저녁노을이 질 무렵 사람을 피해서 한강 둔치를 걷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쪽 하늘을 향해 걷다 보면 삐쭉삐쭉 가지를 치고 줄지어서 있는 미루나무 너머로 하늘은 진한 땅거미로 바뀌어 갑니다. 땅거미가 지는 황혼(黃昏)은 ‘누를 황’에서 ‘어둘 혼’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시간이며, 인생의 길이도 깨닫는 시간입니다.
루카 복음 마지막 장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는 두 제자가 겪은 사건을 말합니다. 한 스타디온이 185m이니까 이 마을은 11km 떨어져 있었겠지요. 걸어서 3시간 거리입니다. 이때 낙담한 채 걷던 제자에게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걷고 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저물어 황혼으로 넘어가려는 때 그분에게 함께 묵자고 청했습니다. 그 시기에 예루살렘은 해가 7시쯤에 지니까 그들은 4시쯤 예루살렘에서 출발했고, 도중에 그분이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은 5시 조금 지났을 때였을 겁니다. 이 세 사람은 어떤 이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서서히 어두워지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어둠이 깔린 집에서 두 제자는 그분과 함께 묵게 되었고, 함께 빵을 뗀 그때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들과 함께 걸었고 말을 나누었고 함께 식사한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그 집에서 묵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어둠의 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자정쯤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 감동의 사건을 다른 제자들에게 증언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 마음이 몹시 무거워진 지금, 오늘도 서쪽 저녁노을 바라보며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계속 걸어야겠습니다. 그러면 황혼을 지나 어두움이 깊어지는 그 길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함께 걸으시며 나를 크게 위로해 주실지 모르니까요. 어둠은 어둠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셔서 함께 해주실 시간입니다. 그러니 잘 참고 기다려야지요.
글 |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