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死別)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하고 계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 슬픔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 힘을 넣어드리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의 부재(不在)로 인한 상실감이 얼마나 컸으면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마저 슬픈 소리로 울었습니다”(김춘수, 부재).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내놓고 극심한 고통 속에 계시는 분들,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가 없는 이 세상,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요. 그가 떠난 빈자리는 얼마나 휑합니까? 그가 생전에 겪었던 끔찍한 고통, 못 다 베푼 사랑, 해준 것 없는 나,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십니까?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 어제처럼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히 돌아가고, 나는 또다시 밥숟가락을 손에 쥐어야 하고….
이런 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디 안심하십시오. 그는 이제 남루한 이 세상의 옷을 벗고 불멸의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근심도 걱정도 눈물도 없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품에 안겨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언젠가 하느님 아버지 품에 한 가족으로 다시 만날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 순간 다양한 방식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해 기도하며, 그들과 우리가 결코 따로따로가 아님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루 삼시 세끼 식사 후 기도 때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중에도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매일 반복되는 촌각의 순간이지만, 그 짧은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죽은 이들과 일치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전에는 연도(煉禱)라고 한 위령기도, 그리고 연미사 역시 산 이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지상에 남아있는 이들의 기도와 미사, 희생과 사랑의 실천은 연옥 영혼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 감사송).
글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