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는 교회가 정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올해는 많은 분들이 ‘이건 나를 위한 날이구나’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19 이후 너무 많은 분들이 전쟁같이 살아왔습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그야말로 진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사라진 손님과 내리지 않는 임대료에 악전고투하는 날을 오래도 버텼습니다. 그런 사업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더 어려우시겠지요. 식당에서, 가게에서, 여행사에서, 그 밖에 수많은 중소기업에서 일하던 많은 분들이 예기치 않은 해고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의 아픔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심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자신만이 힘들다, 가난하다고 외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집을 가진 분들은 자신도 서민인데 팔지도 못하는 집값이 올라 세금만 올랐다고 화를 냅니다. 집이 없는 분들은 집 있는 사람들의 집값이 뛰어 낙오자가 되어버렸다고 화를 냅니다. 사장님들은 매출은 떨어지고 월급 주기도 힘든데 일하는 사람들이 권리만 주장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화를 냅니다. 일하는 분들은 불안하고 힘들어서 투 잡, 쓰리 잡을 하려고 합니다. ‘나도 어려운데 왜 이웃까지 챙겨야 하느냐’고 하실 만합니다.
비영리 연구소를 운영하는 저는 경제적 분배에 대해 연구합니다. 한 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진 소득이나 재산을 가장 작은 사람부터 가장 많은 사람까지 한 줄로 세워 그래프에 그려본 적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니 왜 이렇게 모두 화를 내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순서가 높아질수록 소득이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기울기가 가팔라집니다. 항상 앞 사람과 나와의 거리가, 나와 뒷사람과의 거리보다 더 큽니다. 앞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어 좌절스럽고, 뒷사람이 따라오고 있어 초조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앞만 바라보면 너무 높아진 벽을 보는 것처럼 목이 꺾이고 주저앉게 됩니다. 모두가 가난한 이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 뒤를 바라보며 살아 본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모두가 누군가보다는 힘 있는 사람이고 부자입니다. 가난한 이를 도울 수 있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5년 전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선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가 여전히 우리의 집 문 앞에 누워 있다면 정의나 사회적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나보다 더 어렵고 도움이 필요한 이는 항상 있습니다. 문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피고, 그를 부축해 일으켜 보는 날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글 | 이원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LAB2050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