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6일에 ‘LG 의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많은 상을 받았지만, 이번 LG 의인상은 거의 모든 일간지와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지는 바람에 은사님들과 동료, 친구, 선후배들로부터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성직자가 꿈이었던 제가 신경외과 의사로 45년을 살면서 48년 동안 의료봉사를 지속하게 된 것은 저의 의지가 아니라 원래 그분의 뜻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함흥에서 사시던 부모님과 형님 두 분은 흥남 철수 작전으로 거제도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이웃의 권유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신 부모님 덕에 8세, 5세였던 형들과 저는 거제 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온 가족이 청량리 성당을 다녔습니다. 형들은 이때부터 복사를 섰는데 빨간 옷을 입은 그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당시에는 미사 전례가 라틴어로 되어 있어 복사되기가 쉽지 않았지만, 형님들이 집에서 외우던 기도문을 들으며 따라 외웠던 저는 1959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복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의 일입니다. 오전 반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다가 정류장에서 4·19 혁명에 참가한 시위대를 만나 얼결에 따라다니게 된 것입니다. 다섯 시에 통금 사이렌과 함께 길이 적막해져 두려움에 떨며 울던 저를 어떤 아저씨가 자기 하숙집에 데리고 가서 돌봐주셨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저를 집으로 데려다 준 아저씨는 부모님께 자신을 ‘그날 데모에 참석했던 서울의대 4학년 학생’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밤새 돌아오지 않는 저를 걱정하시며 기도하면서 뜬 눈으로 보내신 부모님께서는 제가 무사히 돌아오자 감격하여 하느님께 저를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역시 신부님이 멋져 보여 망설임 없이 1965년에 소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고등학교 5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라틴어, 영어, 교리, 체육, 음악이 크게 강조되는 예비성직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간섭 없는 자율생활과 좋아하던 운동을 거의 매일 할 수 있었기에 제게는 참으로 행복했던 학창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교 2학년 때 소신학교 수업이 일반학교의 교과과정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연히 본 신설된 신일고등학교 편입생 모집에 호기심으로 응시하였다가 합격하는 바람에 신일고 3학년 편입생이 되었습니다. 성직자로서의 꿈은 사라졌지만, 의사가 성직자와 가장 비슷한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고, 어릴 적 만났던 천사에 대한 기억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원서를 냈고, 단번에 합격했습니다. 이것이 제 능력만으로 된 것은 절대로 아니었기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길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직자가 되려고 배운 라틴어와 영어 위주의 소신학교 수업을 통해 독일어까지 힘들지 않게 배웠고, 잘 길러진 체력으로 새로이 배우게 된 많은 과목을 큰 어려움 없이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글 | 고영초 가시미로(건국대학교병원 신경외과 자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