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오면 아기는 살 수 없습니다.”
제주로 태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뱃속 아기가 17주가 되던 시점이었다. 여행을 이틀 앞두고, 아내가 갑자기 딸내미 ‘만두’의 심장소리를 듣고 싶다고 고집했다. 의아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주님이 우리 가정을 돌보아 주고 계셨다. 아내의 말을 따른 게 신의 한 수였다. 질 초음파를 보는 의사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자궁문이 열려있고 양막이 빠져나온 상태에서, 머리가 자궁 끝에 살짝 걸린 채로 아기가 겨우 버텨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지금 태어나면 너무 어려서 살 수 없으니 큰 병원으로 옮겨서 당장 자궁문을 묶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송을 기다리며 아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하고 되새기고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아직은 아기를 살릴 기회가 있으니, 울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늦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아내를 다독였다.
“울지 마세요. 아기 살리려고 오신 겁니다.”
응급실에서 바로 고위험산모실로 이동 조치되었다. ‘아기를 살리려고 온 거 아니냐.’라는 의사의 말이 있고서야 아내는 울음을 그쳤다. 아기 주수가 23주는 넘어야 인큐베이터라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계산대로라면 우리는 6주를 더 버텨내야 했다. 상황도 예후도 좋지 않았으나 의료진은 하는 데까지 해보기로 했고, 덕분에 아내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수술실 앞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처음 아기가 생겼다고 했을 때부터 오늘까지를 되새겼다. 그동안 매일이 기쁨이었기에, 그만큼 절실하게 빌었다. 아직 못 해준 게 너무 많다고, 조금 더 기회를 주십사 간청했다.
입원 기간 내내 아내는 병원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양수가 부족하여 죽음의 경계선에서 매일 줄타기를 했다. 의사는 결심해야 한다고 채근했다. 양수가 없어서 아기와 엄마가 많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분만을 진행해야 할 거라고 했다. 살 수 없는 아기를 낳아서 죽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절대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아기 앞에 떳떳하고자 했다.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가 보기로 했다. 좋은 감정만을 전달하고자 했다. 부모로서 해줘야 할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믿었다. 아기도 심장소리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아기의 심장소리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요구였고, 또 명령이었다. 그 명령은 너무도 굳건하여서 아빠와 엄마가 흔들리지 않게 다잡아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존재로서 의미가 되고 있었다.
“아빠가 어떻게든 해 볼게”
매일 밤 9시에 성당을 찾았다. 병원 가까이에 성당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매일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바쳤다. 간절히 청했다. ‘저희 아내에게는 버텨낼 수 있는 용기를, 제게는 지치지 않을 끈기를 주소서. 저희 아이를 어여삐 여겨 주시어, 건강히 엄마 아빠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보잘것없는 저희 가정을 성모님의 품 안에서 보살펴 주소서.’ 같은 시간, 아내도 기도했다. 그때는 비신자였기에 묵주를 그저 쓰다듬으며 빌었다고 했다. 나는 매일 아침이면 아기에게 동요를 불러주었고, 잠자기 전에 동화책도 읽어주었다. 아빠의 목소리와 쓰다듬음에 아기가 반응해 주었다. 심장소리로 안부를 전했다. 그렇게 두 달을 버텨냈다. 아내가 아기를 지켰고, 아기는 엄마를 붙들었고, 주님은 산모와 아기를 돌보셨다. 나는 매일을 기록했다. 함께 이뤄낸 기적이었다. 제왕절개를 앞두고, 의료진이 하는 말도 한결같았다. ‘양막 파손 상태에서 이때까지 끌어오신 게 진짜 대단하신 겁니다.’
아기는 25주 6일째에 태어났다. 일곱 달 만에 태어난 이른둥이, 740g으로 두 손바닥에 들어오는 크기였다. 인큐베이터에서 콧줄을 단 채 숨 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길래, “만두야” 하고 불렀다. 눈을 살짝 뜨더니 빤히 나를 보다가 다시 감았다, 마치 내 목소리에 반응해 준 듯이. 너무 고마웠고,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 순간, 나는 아빠로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다짐하였다. 몸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함께임을 알려주고 싶어 녹음기를 샀다. 엄마 아빠 목소리, 읽어주던 동화책, 들려주던 동요를 녹음해 간호사에게 부탁하였다. 아기는 인큐베이터에서 그렇게 122일을 있다가, 해를 넘겨서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겼다. 태어나던 날 만큼이나 집에 오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냄새까지도 또렷하다. 아기는 ‘동맥관개존증’, ‘미숙아망막증’, ‘서혜부탈장’의 고비를 겪고서, 무사히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하고 평온하다.
“이 아이가 성모님이 보살피신 바로 그 아이구먼.”
반에서, 구역에서, 본당에서도 아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다. 성당 교우들은 우리 아이에게 요즘도 성모님이 보살피신 아이라고, 하늘에 기도가 닿은 아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내는 병원에서의 경험으로 세례를 받고 ‘가브리엘라’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아이도 유아세례를 받고 라파엘라가 되었다. 우리는 천사 가정이 됐다. 학창 시절, 내게 사제가 되기를 권하던 교목 신부님께 ‘성가정을 이루겠노라’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말이 20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주님은 이런 식으로 당신의 섭리를 보여주신다.
종종 이른둥이 엄마 아빠에게서 문의가 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말한다. 아기를 믿어보시라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가정을 잘 살펴 주실 것이라고, 댁의 아이도 만두처럼 건강해질 것이라고. 그랬다. ‘만두’는 이른둥이 가정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어있었다.
글 | 최언삼 미카엘(버드내 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