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물이 산더미인데 세탁기가 자주 고장이 나서 한동안 무척 성가셨습니다. 마침 창고를 정리하다가 큼지막한 구식 통돌이 세탁기를 발굴해서 설치했더니, 세상에! 시원시원 너무나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화창한 봄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담요들을 널고 있자니, 제 입에서는 감사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우리 삶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감사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사기도를 바치신 모습을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요한 6,11).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수녀님들께서 친딸처럼 양육하는 청소년 보호시설의 개원 기념 미사 때의 일입니다. 영성체 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우리집에 살면서 감사할 거리 37가지’라는 묵상 글을 낭독했는데, 듣고 있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감사기도보다는 청원기도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눈을 크게 뜨면 더 많은 감사거리를 찾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육의 눈도 크게 뜨지만, 영안(靈眼), 심안(心眼)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에 다다른 벨라뎃다 성녀가, 수도자로서 자신의 일생을 총정리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셨는데, 진정한 의미의 감사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발현하심에도 감사드리지만, 발현하지 않으심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억력이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암기할 수 없었던 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원장 수녀님이 저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 갖은 폭언과 차별, 굴욕의 방 처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 여자가 정녕 그 벨라뎃다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저라는 것과 마치 희귀한 동물 대하듯 바라본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눈앞에 나타나실 때도 감사드리지만, 나타나지 않으실 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나 축복에 감사합니다. 건강과 성공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는,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깊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것에 대해, 이제 남은 것은 바닥을 딛고 올라가는 것뿐임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글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