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고? 나랑 다른 민족인 유대인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해?”
‘원죄’라는 단어 앞에 아마 한 번 이상 가졌던 의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죄와 관련된 초기 교부들의 논쟁은 치열했었죠. 이 때문에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펠라기우스 등 쟁쟁한 신학자들이 결국 이단으로 규정돼 교회에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원죄를 인간의 욕망과 관련지어 신학 이론을 집대성한 후, 교회의 이론가들이 육체적인 본능과 감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합리하게 사는 인간의 삶을 원죄와 연결시키면서, 신학적으로 큰 분수령을 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죄의 자구적 의미에만 매달린 탓에, 유아 세례를 미처 받지 못한 채 죽은 영아들이 원죄를 씻지 않았으니, 천국은 물론, 묘지에도 묻힐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로 인해 부모의 마음이 더욱 찢어지는 슬픈 장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결국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원죄와 관련한 신학이론의 양과 깊이가 워낙 광활하기 때문에, 짧은 지면에서 신학적 논쟁에 관한 말을 섣불리 언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원죄를 연결시키는 것도 의미 있는 신학적 태도이겠지만, 일반 신자로서는 원죄 이론을 아벨을 죽인 카인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오히려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아벨은 죽고 카인의 후예가 결국 지구에 남은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살인자의 후예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신화시대 성경인 창세기의 사건들에는 기록된 사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독법보다는 상징적인 해석이 꼭 필요합니다. 카인이 하느님에게 온전한 제물을 바치지 않은 채, 하느님께 제일 좋은 것을 바친 아벨을 질투해 죽인 상황은, 좋은 복은 남과 나누지 못하고, 오히려 복 없는 이들을 알게 모르게 박해하거나 잊어버리는 우리의 태도와 많이 비슷해 보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은 당연히 내가 잘했기 때문이고, 내가 겪어야 하는 불운에 내 책임은 없다는 식의 아전인수격 생각 말이지요.
그래서 카인 같은 죄인들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죄 없이 병을 앓거나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 이유 없이 전쟁터에서 또는 작업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이들이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소소하고 불필요한 욕심 탓에 비본질적인 일에 집착하고, 일이 내 맘대로 풀리지 않으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남 탓만 하고 있지는 않았었는지 반성해 봅니다. 원죄라는 개념은 그럴 때, 내 죄와 불행의 근원을 알려 주기 위한 심리적, 철학적 장치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행복에는 감사하지 못하고, 타인의 불행을 미리 막지 못한 죄, 타인의 아픔에 눈 감은 죄,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게으름과 이기심. 바로 그런 부족함의 근원으로서의 원죄는 죽을 때까지 잊지 말고 챙겨 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