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선과 악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나아진 점이 많긴 하지만, 얼마 전 ‘선거’라는 행사를 보면서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아예 “정권을 잡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자꾸 들어야 하니, 이러기도 싫고 저러기도 싫은 난감한 시간이었습니다. 꼭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내 일을 통해 세상을 선하게 바꾸고 싶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와 같은 이야기를 할라치면 ‘위선’이라는 시각이 앞서니, 앞으로 “착하게 살자.”라는 말이 아예 금기시될까 걱정입니다. 말로는 “선함”과 “정의”를 외치면서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서로 힐난하는 눈초리가 매섭습니다. 감시 카메라가 작동하듯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일상이 세세하게 다 노출되는 세상이라, 언제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했는지 기억도 못 하는 사건들 때문에 누구나 죄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현대인이 더 위선적인 걸까요? 혹은 더 교묘하게 악해진 걸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인간의 심성에는 악함과 선함이 공존해서, 성장 과정과 처한 환경, 본인의 선택 등 복잡한 요인에 따라 달라지는 것 뿐입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자신이나 혹은 약한 사람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대상에 대한 강렬한 분노를 느낄 수 있고, 아무리 악한 죄를 저지른 이라도 불쌍한 이를 보면 측은지심을 느끼기도 하며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인간의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 혹은 우리 편은 모두 죄가 없고 상대방이 모든 잘못을 했다고 말하는 자기 방어를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합니다. 조직이건, 공동체이건, 상대방을 조종하고 이기려 드는 권력 다툼이 기승을 부리면, 원시적인 투사라는 자기 방어가 발동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비난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 있다면 특히 한 번쯤 읽어 보고 묵상해야 할 대목이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내용입니다. 카인은 자신이 바친 제물을 어여쁘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느님에게 서운한 마음을, 아벨을 죽임으로써 풀려고 합니다. 아무 죄 없는 동생을 죽이는 이유치고는 참 이상하지요. 하지만 비슷한 세상일은 많습니다. 열심히 일했던 직장인이 이유 없이 해고당한 후 앙심을 품고 전 직장을 찾아가 죄 없는 동료들을 해치는 사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상대방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건, 한 번도 칭찬을 해 주지 않았던 부모에게 나쁜 짓을 하는 자녀 등.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변주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지만, 구석으로 몰리다 보면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나쁜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요. 그럼에도 악함은 다스리고 선한 삶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작지만 중요한 그런 노력을 “위선”이라 비난하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카인과 아벨”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남의 흠결이 아니라 내 안의 문제부터 먼저 보아야 세상이 바뀝니다.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진심어린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글 |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