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열매
저는 경기도 여주의 교우촌에 삽니다. 우리나라 교우촌 대부분은 성소의 못자리가 됐죠. 제 외갓집도 교우촌에 있는데, 공소 옆에 고해성사를 보던 옛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곳 액자에 걸린 성직자, 수도자들의 사진을 보고 외삼촌께 여쭤봤더니 공소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제 성소는 친할머니의 기도 열매입니다.
할아버지는 계명, 할머니는 마리아, 아버지는 다두, 어머니는 아가다, 저는 분다, 동생은 요셉입니다. 집에서는 늘 세례명으로 불렸습니다. 동생은 초등학교 입학식 때 선생님께서 주민등록상 이름을 부르니까 자신인 줄 몰랐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할머니는 외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데요, 저와 할머니의 외갓집은 같은 동네입니다. 거기서 며느리를 얻었죠.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에 할머니가 당신 이모님을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전화번호도 모르고 상주에 사시는 것만 알고 있다는 것이었죠. 할머니의 이종사촌인 신부님이 안동교구청에 계신 것을 알고 찾아가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 낯선 길을 떠나 사전 답사를 하고 할머니를 모시고 갔는데, 두 분이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수고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당시 할머니의 이모님은 연세가 아흔둘이었는데, 기억력이 얼마나 좋으신지 열다섯 살에 외웠다는 천주가사를 읊어 주셨습니다. 천주가사를 외우는 생존자가 얼마 없어 광주대교구에서 연구하시는 분이 녹취를 하러 왔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셨죠. 그리고 제가 수녀원에 들어간다고 말씀드렸더니 무척 놀라셨습니다.
“우리 마리아가 자녀들의 성소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는데, 손녀딸이 수녀원에 들어가는구나!”라고 하셔서 얼떨떨했습니다.
당신이 머리 얹고(결혼 후) 우물가에 나갔더니 동네 어르신이 “너는 수녀원에 갈 줄 알았는데 시집을 갔다.”라며 아쉬워하셨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수도생활이 있는 줄 몰랐대요. 그래서 당신 자식들이 원하면 모두 신부·수녀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도하셨답니다. 네 명의 자녀가 신부·수사가 됐으니, 이 또한 기도의 열매입니다.
글 | 천향길 베네딕타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