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배아픔을 이기는 날까지
문득 10년전 전의 일기를 펼쳐보았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복음 묵상을 쓰자.’하고 마음 먹었던 때더군요. 2011년 3월 28일 복음은 고향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잖아.” 하며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오래 머물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그곳을 떠나십니다.
독일 오페라 극장에 신인으로 들어가면 보통 눈에 안 띄는 단역으로 시작하는데 그러다 콩쿠르에서 입상이라도 하고 다른 오페라 극장에서 러브콜을 받게 되면 그제서야 모두들 그를 달리 본다. 물론 이때 대부분 축하를 해주지만 개중에는 “어머, 걔가? 내가 주역할 때 옆에서 두 마디 했던 앤데?” 하는 뾰로통한 반응이 꼭 있다. 나 역시 좋은 결과가 있었을 때, “작은 역할을 했을 때부터 알아봤지!” 하며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선후배 동료들이 있었던 반면, “진짜? 그 애가 어떻게?” 하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사실 나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아는 이가 잘 되었을 때, ‘그래, 그때도 뭔가 남달랐어. 그리 열심히 하더니!’ 하면서도 왠지 못마땅한 점을 찾게 되니 말이다. 더 못나 보이는걸 알면서…. 남의 성공에 대한 배아픔 때문에 잘된 그를 내가 안다는 것이 기쁨이 되지 못하나 보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사람도 되고 귀도 열리는 듯하다. 지금 하는 오페라에 단역으로 함께하는 학생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니 말이다. 나중에 잘 되었을 때, ‘너 그때 단 몇 마디 하는데도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읽어보니 10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사람이 될 듯 말 듯, 귀가 열릴 듯 말 듯 해서 오늘도 예수님은 고향 품에 포근히 안기지는 못하실 듯합니다. 그래도 전례력이 이 복음을 곧 다시 일러줄 터이니 그때마다 마음을 새로이 다져보자고 위로해봅니다. 일기 끝에 상상해서 썼던 이런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뭐? 예수가 큰 예언자가 되어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왔다고? 그가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게 정말이야? 껄껄! 고 예수란 놈, 요만할 때부터 참 영리하고 특이한 구석이 있었지. 그 부모도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참 묵묵히 일하는 착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영특하던 녀석이 그런 큰 사람이 되어서 고향에 다니러왔다니, 내 한 번 만나보고 싶구먼. 어디… 내 얼굴을 아직 기억하려나? 이 조그만 시골서 인물이 났네 그려. 경사야, 경사!! 껄껄껄!”
글 | 임선혜 아녜스(성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