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기적의 차이
전주에서 제일 유명한 전동 성당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치명자산 성지가 있습니다.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유항검 순교자와 그 가족이 함께 잠들어 있는 곳인데요. 1801년 함께 순교한 장남과 차남은 그곳에 함께 머물러 있지만, 그 당시 9세였던 딸과 6세, 3세였던 아들 둘은 유배되었다는 말뿐, 그 후 사연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항검 순교자와 가족의 시복식이 있던 2014년, 거제로 유배를 갔던 딸의 무덤이 발견됩니다. 게다가 그녀가 이웃의 본보기가 될만한 삶을 살았다는 문서 기록과 함께요. 그녀의 이름이 바로 ‘유섬이’입니다.
그 유섬이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 2017년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우연한 인연으로 제가 타이틀롤(=연극·오페라 등에서 제목과 같은 이름의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의 공연에 이어 진주, 거제, 창원, 마산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원 공연 때 사고가 생겼습니다. 마지막 유섬이의 독백 이후 전 출연진의 합창이 있는데,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되면서 반주가 뚝 끊겨버린 겁니다. 연결되는 부분까지는 반주 없이 불렀지만, 음악 없이 다시 합창을 시작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반주 상태에서 저는 다음 액션을 진행했습니다. 뒤돌아서 무대 뒤쪽 끝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적막과 긴장 속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습니다. 다 올라가서 앞을 향해 돌아서면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면서 출연진이 인사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우 류시현의 간절함보다는 유섬이의 마음으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Show must go on!’ 그리고 저는 뒤를 돌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같이 합창곡 ‘주님은 나의 목자’ 반주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무대 위 모든 배우의 걱정하던 눈빛이 안도로 바뀌면서, 저희는 한마음 한 목소리로 합창을 시작했습니다. 그날 저희 무대는 전원 기립박수를 받았고요. 몇 번의 커튼콜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날 일은 우연이었을까요, 기적이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가끔 이런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연과 기적의 차이는 결국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 아닐까요.
글 | 류시현 소화데레사(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