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비 입고 샤워하는 느낌이랍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일인데, 당시 무슨 용기가 났었던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의 연례 피정 지도를 덥석 수락해서, 죽을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강의 후 수녀님들의 질문도 날카롭더군요. 강의 끝에 강의록을 주섬주섬 챙기는 제게, 포스가 느껴지는 한 원로 수녀님께서 질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용도 정말이지 묵직한 돌직구 같았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해왔지만, 부끄럽게도 기도할 때마다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느낌입니다. 나름 열심히 기도해 보지만 언제나 답답하고 지루합니다. 기쁨이나 보람, 개운함이나 시원함을 못 느낍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저보다 수도생활의 연륜이 훨씬 앞선 수녀님,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이미 깊은 영적 생활의 맛을 보고 계신 수녀님의 질문 앞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군요. 마음 같아서는 즉문즉답의 달인인 유명 스님처럼, 포스 넘치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멋진 답변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횡설수설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죄송하다고, 공부를 더 해서 내일 말씀드리겠다며,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돌아와 ‘괜히 왔다!’며 가슴을 쾅쾅 치고 크게 후회를 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기도할 때 우비 입고 샤워하는 느낌. 샤워를 했지만 조금도 개운하거나 시원하지 않은 느낌. 샤워를 했지만 샤워를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듯한 느낌. 기도를 했지만 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듯한 느낌.
그렇다면 나와 하느님 은총 사이를 가로막는 ‘우비’가 과연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증오나 미움의 대상들이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그 존재들이 활기찬 기도생활을 방해하는 우비가 아닐까요? 씻을 수 없는 상처나 수모로 인해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것은 기쁨에 찬 기도생활을 가로막는 우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분노나 억울함도 역동적인 기도생활을 가로막는 우비일 가능성이 큽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져야, 먼지처럼 작아져야, 구름처럼 흘러갈 수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것들, 덜 중요한 것들,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 차원 높은 삶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비우고 나서야 더 깊은 기도생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옭아매는 갖은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면, 그때부터 하느님의 은총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양손 가득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미련 없이 놓으면, 그때부터 하느님의 자비는 풍성해지며, 그때 우리는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글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