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의 빵
예수님께서는 요한 세례자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께 어떤 의미였을까요? 하느님 구원계획의 한 부분이 완성되고 채워진 것으로 끝난 것일까요?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이시지만 또 한편으로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애처로움을 달래시려는 듯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중은 그분의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군중은 얼마나 간절했던지, 배보다 더 빠르게 육로로 그 외딴곳에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군중은 자신들의 딱하고 불쌍한 처지를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 싶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자신의 고통에, 아픔에, 환부에 살짝이라도 닿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아우성 속에서 요한을 잃은 당신의 애처로움을 보셨습니다. 아니 머지않아 당신을 잃게 될, 그래서 울타리를 벗어나 외딴곳에서 아우성치게 될 그들의 애처로움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셨을 때, 이 허허벌판에 석양이 드리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해산시켜 마을로 돌려보내야 할 시간임을 알았기에, 예수님께 이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함께 하는 외딴곳에서의 먹을 것, 마실 것의 부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누가 얼마만큼을 가지고 있든, 그들이 가진 것을 모은 양이 얼마만큼이든, 그분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그분께는 ‘누가! 이웃을 위해서, 지금! 가진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요한 6,9)’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딱하고 애처로운 삶의 외딴곳에서 헤매는 우리에게 빵(성체)의 형상으로 오십니다. 이웃 사랑에 나태하고, 신앙심은 부족하며, 계명에 충실하지 못한 우리를 가엾게 보시고 채워주시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를 성체성사 안에서 맞이하십니다.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빵 다섯 개도 안되는 나약한 믿음뿐인데, 내어놓는 순간 그 보잘 것 없음을 가지고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나와 내가 사는 세상을 충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내가 내 마음을, 사랑을, 관심을, 위로와 희망을 품 안의 ‘빵’처럼, 자선과 희사를 주머니 속의 ‘생선’처럼 내어 놓음 안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배불리십니다. 그리고 열 두 광주리에 남은 것을 나에게 다시 돌려주십니다.
**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기념하는 성당은 갈릴래아 호수 서북쪽 ‘타브가’라는 곳에 있습니다. 성당 제대 앞에는 빵 4개가 들어 있는 성합과 물고기 두 마리가 모자이크되어 있습니다. 빵이 4개인 이유는 ‘매일 미사를 통해서 거행되는 성체성사가 나머지 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글 | 이상용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교구 성소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