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전환’이 필요하다
2018년 제48차 IPCC(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 총회의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는 산업화 이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억제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 권고를 따르려면 전 세계가 탄소배출을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45% 감축하고, 2050년에는 ‘탄소 제로’를 달성해야 합니다. 이 권고는 오늘날의 대량 생산, 유통, 소비, 폐기 체제의 ‘근원적 전환’으로만 가능합니다. 산업화 이후 세상이 발전할수록 ‘위험’도 커졌습니다. 21세기에 부쩍 늘어난 바이러스 감염은 발전의 부산물인 기후변화나 숲의 파괴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추정들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재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확대하는 시스템을 계속 고집하면 가능성이 현실이 될 확률은 그만큼 커집니다. 어차피 변화는 불가피합니다. “강제된 변화인가 자발적 변화인가?” 이 물음을 직시하고 고민한다면, 코로나19 재난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산업화 이후 물질적 풍요를 약속했던 성장과 개발의 결과로 자연은 파괴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해지며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만족과 여유가 아니라 긴장과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이 급증했습니다. 풍요는 소수의 풍요를 뜻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논의는 흔히 주의를 다른 곳에 돌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찬미받으소서> 194항),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지구의 울부짖음은 더 커졌습니다(49항). 근원적 전환은 성장과 개발이라는 환상을 단호히 거부할 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부는 포스트 코로나 대응 방안으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두 축으로 하는 ‘한국판 뉴딜’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그린 뉴딜에서 정작 ‘그린’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산업 문명의 ‘발전’에 대한 고민은 없고 경기 부양을 위한 ‘사업’만 있습니다. ‘그린’을 말하면서 하루속히 ‘회색’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근원적 전환은 “이윤이 유일한 판단 기준”인 시장 논리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187항). “이윤 극대화의 원칙”으로 작동하는 시장은 “미래 자원이나 환경의 건강” 훼손은 개의치 않습니다(195항). 경제에 정치가 필요한 까닭입니다(189, 196항). 정치가 ‘공동선의 증진’이라는 제 역할을 할 때, 경제는 “효율 중심의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 종속”되지 않고 ‘살림살이’라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189항). 근원적 전환은 정치적 행위입니다.
“성장 신화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세상으로” 올해 가톨릭교회가 발표한 ‘환경의 날’ 담화문 제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속해야 할 것은 성장이나 발전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글 | 조현철 프란치스코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녹색연합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