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받으소서>에 관한 ‘특별 기념의 해’를 시작하며
코로나19 감염과 기후위기는 근원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가던 길을 재촉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지난 5월 24일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마무리하며 다시 <찬미받으소서>에 관한 ‘특별 기념의 해’를 선포한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비문화의 홍수 속에서 안식일 정신을 수용하는 자발적 자기 제한의 삶이 가능할까요? 지금까지 소수가 누려왔고, 다수가 선망해 온 풍요와 편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희년을 선포하시고 타자를 위한 자발적 자기 제한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습니다(요한 16,33).
삼위일체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고유한 삼위일체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39항). 삼위일체를 묘사하는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상호내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의 완전한 개방과 신뢰와 의탁으로 온전히 하나를 이룬다고 말합니다(요한 14,20; 17,23).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사랑은 비울수록 채워집니다. 삼위일체를 가장 빼닮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자신을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역설의 존재입니다. 자기 비움이 인간 본질의 내적 역동성이라면, 타자를 위한 자발적 자기 제한, 검약과 절제의 삶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방하고 완성합니다(223항). 자기 확장에 몰두하는 탐욕이야말로 인간 정체성의 부정입니다. 인간 정체성의 긍정은 자발적 자기 제한에 있습니다.
코로나19 감염으로 뒤늦게 학교가 개학했습니다. 감염을 막는다고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이 엄마도 친구도 없이 홀로 난생처음인 학교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이 현실을 만들었다는 자괴감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종의 물음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160항) 정부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우리마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어린이들을 보아서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스팔트에 균열을 내는 것은 이름 없는 풀입니다.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이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우리 모두 ‘특별 기념의 해’를 지냈으면 합니다(231항). 우리가 “역사상 가장 무책임한 세대”가 아니라 기꺼이 “자기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세대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165항).
글 | 조현철 프란치스코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녹색연합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