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믿는 것
제가 신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보니 신학생들이나 신자들로부터 가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피임은 죄인가요?”, “난임 부부를 위한 인공수정은 정부에서 보조금까지 주는데 교회는 왜 반대하나요?” 이러한 윤리적 사안들에 대해 교회는 예로부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왔고, 이러한 교회의 입장에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이 “결혼하지도 않은 신부가 부부생활에 대해 뭘 안다고 이래라저래라 하는가?”라는 볼멘소리를 내기도 하지요. 물론 실제로 체험해서 아는 것이 이론상으로 아는 것보다 더 자세하고 현실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앎의 대상이 신앙의 진리와 관련된 것일 때, 상황은 조금 달라집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에 기초하는 것이어서 경험을 통해 아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아는 한 사람을 봅니다.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을 마주친 그는 이렇게 말하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의 이 고백은 으뜸 제자인 베드로가 했던 다음의 고백과 유사해 보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 고백과 함께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습니다. 그런데 유사한 고백을 한 더러운 영은 꾸짖음과 함께 쫓겨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두 고백의 결과를 전혀 다르게 만든 것은 바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앎의 대상은 우리의 맞은편에 자리합니다.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알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믿는 사람의 편에 서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앎이 전제 조건이지만, 앎이 믿음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앎을 완성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기초하는 앎은 그 어떤 실천적 지식보다 튼튼한 토대를 갖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은 회당에 모여 있던 다른 어떤 사람보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앎이 오히려 그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 알긴 했지만 믿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고도 믿지 않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2베드 2,21).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고 있는 우리들, 이제 그분의 편에 굳건히 서서 그분처럼 사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글 | 박찬호 필립보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