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완전 폐지 입법 추진을 강력 반대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법무부 정책 자문 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가 임신 주수와 상관없이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을 완전히 폐지하는 권고안을 법무부에 제출한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 깊은 유감을 표하며 아래와 같이 우리의 견해를 천명하고자 합니다.
1.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권고안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토대로 임신 주수와 상관없이 모든 형태의 낙태를 합법화, 비범죄화하고 처벌 조항을 완전히 삭제하는 데 기반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행복과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태아와 산모는 엄연히 서로 다른 존재이며, 태아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의 범위 안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낙태죄 완전 폐지’는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해야 하는 헌법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이미 국가는 다수의 헌법재판소 판결을 통하여 “모든 인간은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형성 중의 생명인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母)에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아도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국가는 헌법 제10조 제2문에 따라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라고 명백하게 선언하였습니다(헌재 2008.7.31. 2004헌바81; 헌재 2008.7.31. 2004헌마1010 등; 헌재 2010.5.27. 2005헌마346; 헌재 2012.8.23. 2010헌바402 참조).
3.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의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도 당시 판결문에서 태아의 생명 보호를 “공익”으로 인정하였고, 임신 기간 전체에 걸쳐 이루어진 모든 낙태를 처벌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용인하기 어려운 법적 공백”으로 간주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가가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낙태죄 완전 폐지를 입법화하고 태아의 생명권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헌법재판소를 통하여 스스로 선언한 국가의 책무를 포기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4. 우리는 이미 낙태를 합법화한 여러 나라에서도 대체로 임신 주수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그에 앞서 상담 절차를 거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임신 주수가 길어질수록 낙태에 따른 여성의 건강이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흔히 안전하지 않은 낙태가 모성 사망과 질병의 주요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낙태죄 폐지를 말하지만, 임신 주수와 상관없이 모든 형태의 낙태를 허용하게 된다면 이것 또한 여성의 건강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여성 임신과 출산의 문제는 ‘낙태죄 완전 폐지’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을 오로지 여성에게만 책임 지우는 사회 문화를 개선해야만 해결되는 일입니다. 이에 국가는 ‘낙태죄 완전 폐지’가 해결책이 아님을 직시하고, 남성과 여성이 공동 책임을 지고,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공동 책임을 지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5. 가톨릭 교회는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내세워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들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언론, ‘과반과 다수’에 기반한 법의 제정, 이를 승인하는 국가의 정책 방향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이는 생명의 초기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공격들을 더 이상 ‘범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권리’로 주장하며, 특권층의 이익이나 다수의 논리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교회는 국가 정책이나 법은 다수결의 논리가 아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인권, 공동선과 연대성, 사랑과 정의 등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자연법에 근거하여 제정되기를 촉구합니다.
6. 가톨릭 교회는, 인간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이며,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아야 함을 일관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수정 이후 21-22시간이면 부계와 모계의 유전 형질이 조합되고, 3주에 들어서면 심장이 박동하며, 8주째에는 뇌의 활동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날 배아와 태아도 온전한 ‘인격’으로서 생명의 절대적 권리를 인정받아야 하고, 국가는 인간 생명의 발달 과정에 상관없이, 모든 생명을 소중한 한 인간이며 인격으로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한국 사회는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 문화를 이끌어 가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7. 국가는 생명권 보호와 약자 보호의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여성의 행복과 자기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태아의 생명권을 박탈한다면, 그것은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과 약자 보호의 국가 책무를 저버리고, 나아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동안 임신과 출산에서 남성보다 힘겹게 살아온 여성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성보다 더 연약한 태아를 보호하는 것 또한 국가가 저버릴 수 없는 중대한 책무입니다. 임부에게 의존하는 태아는 임부보다 더 약한 존재이며, 더구나 무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아의 생명을 국가마저 보호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의무를 완전히 포기하는 불의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법무부의 ‘낙태죄 완전 폐지’ 방향의 입법 추진을 강력히 반대합니다. 국가의 ‘낙태죄 완전 폐지’는 현안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여성이 안심하고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는 정책과 입법 활동, 낙태의 위험성과 부작용에 대한 다양한 상담 지원, 환자와 의사의 낙태 거부 권리 인정, 사회 문화 개선 활동, 사회 복지 지원 활동 등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법률 개정을 앞둔 현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임신과 출산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지는 공정한 제도를 마련하고, ‘더 나은 대한민국’으로서 ‘생명 존중’의 토대와 생명 문화 건설에 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0년 8월 28일
한국 천주교 주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