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기쁨’을 원하십니까? ‘사랑’을 원하십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진정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하느님 나라’를 원하십니까? 간절히 원하신다면 ‘용서’하십시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용서하는 그 순간 그토록 원하던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충만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가 열쇠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잘 실천합니다. 그런데 잘못의 정도가 너무 심하면 조금 다릅니다. 받은 상처와 충격이 너무 큰데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수없이 외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왜?’ 그럼에도 ‘용서해야 한다.’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여전히 힘겹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를 간절히 바쳐도 용서할 힘이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미움과 분노와 원망만 점점 커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기도할 때는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 앞에서 또다시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되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은 병들고, 삶이 망가지고 깨져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미움과 원망, 분노와 증오가 쌓여 한이 되고 한이 깊어지면 병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에 무엇이 간직되어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 행복, 사랑, 기쁨, 평화가 있습니까? 아니면 미움, 원망, 분노로 힘들어하지는 않습니까? 용서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상처받아 힘들어하는 자신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치유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할 힘과 지혜의 은총을 허락해 주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하기 어렵다면 내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임금에게 만 탈렌트(1탈렌트=금34Kg[현시세:1Kg=8천6백만 원])라는 엄청난 액수를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 품삯) 이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적은 액수를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멱살을 잡고 감옥에까지 보내는 어이없는 상황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힘만으로 용서하기 어려울 때, 주님의 한없으신 자비와 나를 먼저 용서해 주신 분들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용서는 내 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글 | 이용기 안드레아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장 겸 제2대리구 복음화1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