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대형마트는 물론이고 식당, 카페, 극장, 기차역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계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키오스크’라고 불리는 터치스크린 방식의 무인 단말기입니다. 이게 뭔가 편하면서도 불편합니다. 잘 몰라서 쩔쩔매는 젊은 학생들도 여럿 봤습니다. 어르신들은 오죽할까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대형마트의 키오스크에서 계산하는데 옆의 어르신께서 꽤나 난처하신 듯 보였습니다. 물건 바코드 찍을 줄도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도와드려야 하나 망설이던 그 순간, 마치 슈퍼맨처럼 재빠르게 한 직원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어머님, 이건 이렇게 하시면 되고요. 또 이건 저렇게 하시면 되고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그 직원분은 능수능란하게 어르신을 도와드렸습니다. 아주 쉽고 친절하게 키오스크를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 잘 가르쳐 주시더군요. 그 어르신 또한 직원을 향한 감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름답고도 모범적인 ‘직원’과 ‘고객’의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모든 마트에서 이런 훈훈한 광경만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하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표어는 사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서 갖는 어떤 다짐일 텐데, 일부 손님들은 진짜 자기가 ‘왕’이라도 된 것처럼 무리한 요구를 늘어놓습니다. 반면에 직업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손님이 오는 것도 짜증이 나는 듯 그저 불친절하기만 한 직원들도 더러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손님도, 영원한 직원도 없다는 것이죠.
사회는 혼자 살아가는 공간이 아닙니다. 여럿이 모여 살아가며 그 안에서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지요.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때론 손님이고 때론 직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우리 모두는 ‘노동자’이고, 바로 이 ‘노동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나만이 ‘사람’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직원도 ‘사람’입니다. 나만이 ‘사람’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공무원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노동자의 권리는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탁월한 인간 존엄에 바탕을 둔다. 교회의 사회 교도권은 이 권리들이 법체계 안에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중 몇 가지 권리를 열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아 왔다. 그것은 곧 정당한 임금에 대한 권리, … 자신의 양심과 존엄성이 모독을 받지 않고 일터에서 자신의 인격을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 등이 있다”(『간추린 사회 교리』 301항).
사회는 ‘나’와 ‘키오스크’가 만나는 공간이 아닙니다. ‘나’와 그리고 나만큼 소중한 ‘너’가 만나는 곳입니다. 따뜻한 만남으로만 가득한 세상을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