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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재판주의와 증거신앙주의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4-09-20 09:20:49 조회수 : 93

법으로 먹고사는 법조인들을 제외하고, 일반 사람들은 살면서 소송을 경험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민사소송이든 형사소송이든 소송을 경험해 본 의뢰인들 대부분은 소송 과정이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전쟁터 같은 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판사를 잘 만나는 것?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 중간에 꺾이지 않는 마음? 물론 이런 것도 중요할 수 있겠습니다만, 같은 질문을 법조인들에게 해 보면 백이면 백 모두 “증거”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소송은 결국 ‘증거싸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현대 사법제도의 근간인 ‘증거재판주의’는 ‘증거에 의해서만 재판의 전제가 되는 사실을 인정하는 원칙’을 말합니다(형사소송법 제307조). 이는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의 원님 재판을 방지하고,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이 극명하게 위반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신앙 선조들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당시, 수많은 순교 선조들은 단순히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범죄의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의 믿음 자체가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순교자들의 죽음은 믿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순교’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증언, 증거(martyrium)’를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순교는 증거가 필요 없는 죽음이었지만, 그 죽음은 신앙의 가장 강력한 형태의 증거가 되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극단적인 형태의 순교를 요구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는 법정에서의 증거재판주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과정입니다. 법정에서 증거 없는 주장은 힘을 잃습니다. 마찬가지로,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신앙은 공허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교 선조들은 하느님을 위한 삶과 죽음이라는 행동으로 신앙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통해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며, 사회적 약자를 돕는 등의 행동은 우리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신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순교’의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신앙인다운 삶을 가로막는 각종 유혹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하는 모든 것은 현대 사회의 박해와도 같습니다. 그러한 박해와 불의에 맞서 진실을 말하고 진리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 편견과 차별에 맞서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사는 이 모든 것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순교자의 길’일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의 끝자락에 우리 모두 신앙 선조들의 용기와 믿음을 본받아 각자의 삶에서 신앙의 증인이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증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