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6세 교황(1897~1978)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몬티니는 어려서 몸이 많이 약해 교구 신학교를 집에서 통학했습니다. 몬티니는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중학교 때 그를 지도한 선생님은 ‘몬티니는 글솜씨가 매우 뛰어나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훌륭한 기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가 된 몬티니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수료 후에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무려 30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몬티니는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밀라노대교구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췄습니다. 밀라노대교구에 대한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요한 23세 교황은 몬티니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해에 요한 23세 교황이 갑자기 선종했고, 후임 교황으로 몬티니 추기경이 선출되었습니다. 추기경은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이름을 ‘바오로 6세’라 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전임 교황이 시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속개, 현실에 맞지 않는 교회법 개정, 그리스도교의 일치 운동’ 등을 착실히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교황 최초로 오대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을 모두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 교황’이라고도 부릅니다. 교황이 특별히 이룬 업적은 세계 주교 시노드 개최와 ‘추기경의 국제화’였습니다. 이제까지 추기경은 유럽 출신이 대다수였는데 바오로 6세 교황은 제3세계 출신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대주교가 한국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되었습니다. 교황의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오래되었습니다. 교황은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을 허락했고,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식을 주례했습니다. 시복된 순교자 24위는 후에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었습니다. 시복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당시 대주교)이 교황을 알현했을 때, 교황은 “한국교회를 특별히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교황은 겸손하고 검소했습니다. 밀라노대교구 신자들이 교황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삼층관(교황관)’을 선물했습니다. 교황은 그 삼층관을 공의회까지만 쓰고 미국에 있는 한 성당에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선종했을 때도 장례미사는 검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 바닥에 관을 놓았고, 관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관 위에는 오직 성경만 놓여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 때문에 오셨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