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벤투라(1221~1274)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디 피단자’였으나 ‘보나벤투라’로 바꾸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조반니가 어렸을 때 큰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달려가 “아이가 살아나기만 하면 꼭 수도원에 보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성인은 아이를 안고 기도하고 축복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성인은 너무 기뻐서 “오! 보나벤투라(기쁜 일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때부터 ‘보나벤투라’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자 어머니는 성인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열일곱 살에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갔습니다. 수련 기간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 세계 최고의 신학대학인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고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파리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보나벤투라가 신학을 가르칠 때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철학, 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에 대해 토론했고, 서로가 신앙적, 학문적 성장을 자극하고 독려했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에게 성체 찬미가를 작사하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 작품 중에 나은 것을 택하려 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작사하였고, 드디어 일을 끝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먼저 본 보나벤투라는 “토마스의 작품이 제 작품보다 훨씬 훌륭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작품을 찢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겸손했습니다. 후에 보나벤투라는 파격적으로 서른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쓰고 수도회 회칙을 만들었습니다.
보나벤투라를 얘기할 때 꼭 기억할 것이 바로 ‘삼종기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삼종기도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님께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드린 것을 기념해 매일 아침, 낮, 저녁 세 번 드리는 기도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어렸을 때부터 성모님을 극히 공경했습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마다 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성모 찬송 미사를 봉헌했고,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삼종기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그림이 있습니다. 멀리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밀레의 ‘만종(晩鐘)’입니다. 겸손을 뜻하는 영어는 ‘humility’이며, 이 말의 어원은 ‘흙’입니다. 겸손은 흙처럼 되는 것입니다. 보나벤투라는 ‘흙같이 겸손한 성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