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고레티(1890~1902)는 ‘묵주기도 성월’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성모님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딸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재산이라고는 손바닥만 한 작은 땅과 간신히 기거할 수 있는 작은 집이 전부였습니다. 하루하루 고된 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던 마리아의 아버지는 그녀가 아홉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아의 집은 성당과 학교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학교에 갈 수도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도 없어 어머니가 집에서 신앙교육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므로 제일 무서워해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마리아의 방에는 소중히 여기는 성모님 상본이 걸려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많은 시간을 성모님께 기도드리고 성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리아는 열 살이 훨씬 지난 후에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첫영성체가 늦어진 것은 너무 어렸고, 기도문도 잘 외우지 못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성체 준비물도 제대로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첫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어머니께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교우들이 첫영성체에 필요한 옷, 미사보, 화관, 구두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마리아의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집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어야 했습니다. 그중에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에게 눈독을 들였습니다. 마리아를 여러 번 겁탈하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리아는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전날, 그는 일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마리아를 방으로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방 밖에서 기다리던 마리아를 강제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마리아는 저항했습니다. 계속되는 저항에 화가 난 그는 칼로 마리아를 닥치는 대로 찌르고 도망갔습니다. 어머니가 마리아의 처참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병원으로 급히 옮겼습니다.
병자성사를 주러 온 신부님이 마리아에게 “너를 그렇게 만든 그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마리아가 “네, 그를 용서하고 그가 천국에 가도록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녜스 성녀처럼 꽃다운 나이에 죽음으로 신앙과 동정을 지켰습니다.
한편, 마리아를 겁탈하려 했던 청년은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깊이 뉘우쳤고, 감옥에서 나온 후 가장 먼저 마리아의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는 남은 삶을 수도원 정원사로 일하며 속죄했습니다.
“용서는
어두운 감정을 황금빛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