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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청하는 믿음 (Fiducia Supplicans)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1-09 조회수 : 1127

교황청 신앙교리부

축복의 사목적 의미에 관한 선언 


간청하는 믿음

(Fiducia Supplicans)


소개


이 선언은 지난 몇 년과 최근에 교황청 신앙교리부에 제기된 다양한 질문들을 고려한다. 이 문서의 작성을 위하여 관례에 따라서 전문가들에게 자문하였고 적합한 초안 작성 과정을 거쳤으며 신앙교리부 교리 부서의 회의에서 초안이 논의되었다. 이 문서를 작성하는 동안 교황님과도 논의하였다. 마침내 이 선언은 교황 성하의 심의에 들어갔으며 그분의 서명으로 승인되었다.


이 문서의 주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일부 추기경의 의문들에 대한 교황님의 답변이 알려졌고, 그 답변은 지금 여기서 제시되는 숙고에 중요한 설명을 제공했으며 신앙교리부의 이 작업에 결정적인 요소를 보여 주었다. “우선 교황청은 베드로의 후계자를 위한 봉사의 도구”(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 II, 1)이므로, 우리의 작업은 교회의 항구한 교리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교황의 가르침에 대한 수용을 장려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된 두 추기경의 의문들에 대한 교황님의 답변과 같이, 이 선언은 혼인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확고히 견지하며,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어떤 종류의 전례 예식이나 전례 예식과 비슷한 축복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문서의 가치는 축복의 사목적 의미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기여를 제공하여 전례적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된 축복에 관한 고전적 이해를 넓히고 풍요롭게 해 준다는 것에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적 전망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신학적 성찰은 교도권과 교회의 공식 문헌에서 축복에 대하여 언급된 내용에서 참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 문헌이 ‘선언’의 형식을 취한 이유이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과 동성 커플의 신분(status)을 공식적으로 유효화하거나 혼인에 관한 교회의 영원한 가르침을 어떤 식으로도 수정하지 않은 채 그들을 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선언은 주님의 자비 안에서 깊은 신뢰의 여러 동작으로 주님을 흠숭하고 이러한 태도로 끊임없이 어머니이신 교회에 나아와 축복을 청하는 충실한 하느님 백성에게 바치는 헌사가 되기를 바란다.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


서문


1.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간청하는 믿음은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솟아 나오는 축복의 선물을 받는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이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상기시켜 주셨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가장 위대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한 복이시며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 복이십니다. 그분은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직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로마 5,8)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복으로 내려 주신 영원한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께서 육화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바쳐지셨습니다.”1)


2. 이렇게 위대하고 위안이 되는 진리에 힘입어 본 신앙교리부는 동성 커플을 축복할 가능성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부적이고 사목적인 방식에 비추어 2021년 2월 22일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작성하여 발표한 ‘의문에 대한 답변’2)에 관한 새로운 설명을 제공할 가능성에 관하여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여러 질문들을 검토하였다.


3. 위에 언급된 ‘답변’은 적지 않은 여러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일부는 그 문헌의 명료함과 교회의 지속적인 가르침과 합치됨에 박수를 보내며 환영하였고, 일부는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에 동의하지 않거나, ‘답변’의 표현과 첨부된 ‘주해’에 제시된 이유가 별로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후자의 반응에 형제적 사랑으로 화답하기 위하여 이 주제를 다시 다루어 교리적 측면과 사목적 측면을 일관성 있게 통합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모든 교리의 가르침이 친교와 사랑과 증언으로 마음의 동의를 일깨우는 복음 선포자의 생활 방식 안에 자리 잡아야 되기”3) 때문이다.


I. 혼인성사 안에서의 축복


4. 두 추기경이 제기한 다섯 질문 중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최근 답변4)은 특히 사목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더욱 심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혼인이 아닌 어떤 것을 혼인으로 인정하는 것”5)을 피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자녀 출산에 열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배타적이고 안정적이며 불가해소적인 결합”6)인 혼인의 본질적 구성 요소와 그것과 반대되는 것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예식과 기도는 허용될 수 없다. 이러한 신념은 혼인에 관한 항구한 가톨릭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오직 이러한 맥락에서만 성관계가 자연스럽고 적합하며 온전히 인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점에 대한 교회의 교리는 여전히 확고하다.


5. 이것은 또한 복음이 제시한 혼인에 관한 이해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축복과 관련하여 이러한 신념에 반대될 수 있거나 어떤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예식을 지양할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동성인 사람들 간의 결합에 축복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명시한 당시 신앙교리성의 “답변”의 의미이기도 하다.


6. 혼인성사 예식의 경우, 이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성직자에게 유보된 행위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 경우, 성직자의 축복은 혼인 합의로써 배타적이고 불가해소적인 계약을 맺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특정한 결합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 사실은 혼인성사 예식과 어떤 다른 결합에 주어지는 축복을 혼동할 위험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II. 여러 축복의 의미


7. 한편, 위에 언급된 교황 성하의 답변은 축복의 의미를 더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8. 축복은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끊임없이 발달하는 준성사 중 하나로 여길 수 있다. 실제로 축복은 삶의 모든 사건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도록 이끌고, 인간이 창조된 물건을 사용할 때도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며 충실히 섬기도록 초대받았음을 상기시켜 준다.7) 이러한 까닭에 축복의 대상은 사람, 경배와 신심을 위한 물건, 성화상, 삶과 일과 고난의 장소, 땅과 인간 수고의 결실,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찬미와 축복을 창조주께 되돌려 드리는 모든 피조물이다.


축복 예식의 전례적 의미


9. 전례적 관점에서 엄밀히 볼 때, 축복은 축복의 대상이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표현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할 것을 요구한다.


10. 실제로 축복은 신앙의 힘으로 거행되고 하느님 찬미와 그분 백성의 영적 선익을 위한 것이다. 이는 《로마 예식서》의 『축복 예식』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로이다. “이러한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축복 기도는 오랜 전통에 따라 하느님께 받은 특은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청하며 세상에서 악마의 권세를 물리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8)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는 이들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으로 마음 준비를” 더 굳건히 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재촉하는 사랑”9)에 의탁하도록 초대받는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간청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기회는 주어진다.”라고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의 규범과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어떤 사물이나 장소나 환경”10)에서 그러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제안한 예식인 축복의 전례적 이해이다.


11. 이러한 고려 사항을 바탕으로 신앙교리성의 2021년 답변(Responsum)에 관한 ‘주해’는 특정한 전례 예식으로 어떤 인간관계에 축복을 기원할 때 축복을 받은 대상이 창조 질서 안에 새겨져 있고 주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계시하신 하느님의 계획과 일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언제나 혼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만을 윤리적으로 합법적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축복이 어떤 식으로든 혼인으로 추정되는 결합이나 혼외 성행위에 대하여 윤리적 합법화를 부여할 수 있는 경우, 교회는 전례적 축복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언의 요지는 교황께서 두 추기경의 ‘의문들’에 대한 당신의 “답변”에서 재확인하신 바 있다.


12. 오직 이러한 관점으로만 축복의 의미를 축소하는 위험도 피해야 한다. 어떤 단순한 축복을 위해서도 성사를 받을 때 요구되는 것과 똑같은 윤리적 조건을 강요하도록 우리를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 때문에 우리는 이 관점을 더 넓혀야 한다. 실제로, 매우 사랑받고 널리 퍼져 있는 사목적 행위가 너무 많은 윤리적인 전제 조건 아래 놓이게 될 위험이 있으며, 이는 감독이라는 핑계로 축복 행위의 기반이 되는 하느님 사랑의 무조건적인 힘을 그늘에 가릴 수도 있다.


13. 바로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의 모든 결정과 태도를 관통하여야 하는 사목적 자비를 잃지 말고”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배제하기만 하는 심판관”11)이 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권고하셨다. 우리는 축복에 대하여 더욱 폭넓은 이해를 발전시켜 교황님의 이러한 제안에 응답하여야 한다. 


성경 안에서의 축복


14. 다양한 관점을 모아 축복에 대하여 고찰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목소리로 우리를 비추어야 한다.


15.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구약 성경 민수기 안에 있는 이 “사제적 축복”은 “하강”의 성격을 지닌다.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리는 복의 간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축복의 가장 오래된 본문 중 하나를 구성한다. 그리고 성경의 책장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두 번째 유형의 축복이 있다. 그 축복은 땅에서 하늘로 하느님을 향하여 “상승”한다. 축복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충실함에, 그분께서 창조하신 놀라움에, 그리고 그분의 뜻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에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축하며 감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시편 103[102],1)


16.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축복으로 응답한다.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아브람을 축복했다(창세 14,19 참조). 레베카는 이사악의 아내가 되기 전 가족들로부터 축복을 받았다(창세 24,60 참조). 그리고 레베카는 아들 야곱을 축복하였다(창세 27,27 참조). 야곱은 파라오를 축복하였고(창세 47,10 참조), 손자인 에프라임과 므나쎄(창세 48,20 참조)와 열두 아들 모두도 축복하였다(창세 49,28 참조). 모세와 아론은 공동체를 축복하였다(탈출 39,43; 레위 9,22 참조). 가장은 혼인 때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자녀를 축복한다. 이러한 축복들은 이렇게 아주 풍성하고 조건 없는 선물로 등장한다.


17. 신약 성경에 나오는 축복은 본질적으로 구약의 그것과 같은 의미를 보존한다. “하강”하는 신적인 선물과 “상승”하는 인간의 감사, 그리고 인간이 주는 축복이 같은 인간을 향하여 “확장”되는 것을 다시 발견한다. 즈카르야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된 다음 주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주님을 찬미하였다(루카 1,64 참조). 늙은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구원자 메시아를 보는 은총을 내려 주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또 아기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도 축복하였다(루카 2,34 참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찬미하나이다.’(마태 11,25 참조)라는 유명한 찬미와 환희의 노래로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하셨다.


18. 구약 성경에 이어 예수님께도 축복은 하느님 아버지와 관련하여 상승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고 은총과 보호, 선익의 행위로 다른 이들에게 내려 주시는 하강의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러한 실천을 하시고 장려하셨다. 예를 들면, 어린이들을 축복하셨다.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6). 하느님 아버지께로 오르시기 직전,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열한 제자를 위하여 아껴두신 마지막 축복으로 정확히 끝난다.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지상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모습은 바로 축복의 행위로 두 손을 높이 들고 계신 모습이다.


19.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교회에 축복할 권한을 부여하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고 인간이 이웃에게 나누는 축복은 포용과 연대, 화해로 변모한다. 축복은 위로와 돌봄, 격려의 긍정적인 메시지이다. 축복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과, 신자가 자기 형제자매에 대하여 하느님과 같은 감정을 가지도록 초대하는 교회의 모성을 표현한다. 


축복의 신학적-사목적 이해


20. 축복을 청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애 안에 하느님의 구원적 현존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교회에 축복을 청하는 사람은 교회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성사라는 것을 인정한다. 교회에서 축복을 찾는 것은 교회의 삶이 하느님 자비의 품에서 솟아 나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더 나은 삶을 살며 주님의 뜻에 응답하도록 돕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축복에 대한 좀 더 사목적으로 접근하여야 하는 중요성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축복을 청하는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요청과, 더 잘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과,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12)이라는 사실을 신앙과 부성적 자비의 자세로 성찰할 것을 촉구하셨다. 이러한 요청은 모든 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고 동반되어야 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축복을 자발적으로 청하러 오는 사람은 이러한 요청으로 초월에 대한 진지한 개방성, 자신의 힘만 믿지 않는 마음의 신뢰,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마음, 한계에 갇힌 이 세상의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 준다.


22.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처럼, 이러한 신뢰를 넘어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은 없다. 신뢰를 통하여 은총의 원천이 우리 삶에 넘쳐흐른다. …… 가장 적절한 태도는 마음의 신뢰를 우리 밖에 두는 것이다. 곧, 제한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우리 마음의 신뢰를 두는 것이다. …… 세상의 죄는 엄청나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오히려 구세주의 자비로운 사랑이 무한하다.”13)


23. 이러한 신앙의 표현을 전례의 틀 밖에서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더 큰 자발성과 자유의 영역 안에 있게 된다. 그런데 “신심 행위가 선택적인 성격의 것이라 해서 결코 그러한 행위를 과소평가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이 분야에 요구되는 것은 대중 신심의 많은 부요와 이와 같은 부요의 잠재력, 그것이 고무하는 열심한 그리스도교 생활에 대한 올바르고 현명한 평가이다.”14) 축복은 이렇게 위험이나 문제가 아니라 높이 평가하여야 하는 사목적 자원이 된다. 


24. 사목적 배려의 관점에서 고려하여 보면 축복은 심신 행위로 평가되어야 한다. 곧, “성찬례와 다른 성사들의 거행과 별개의 것”으로서 “대중 신심의 언어나 리듬, 절차, 신학적 강조점은 전례 행위의 그것들과 다르다.” 같은 이유로 “신심 행위는 고유한 양식과 소박성, 언어를 보존하여야 하며, 신심 행위에 ‘전례 거행’의 형식들을 가미하려는 시도는 없어야 한다.”15)


25. 더욱이 교회는 사목적 실천을 어떤 교리나 규율 도식의 고정성에 의존하는 것을 피하여야 하는데, 특히 그것이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엘리트주의”를 낳고 “복음화하는 대신에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은총의 문을 열기보다는 검토하고 검증하는 데에 자신의 힘을 소진해”16) 버릴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축복을 간청할 때 축복을 베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철저한 윤리적 분석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윤리적 완전성을 사전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26. 이러한 전망에서 교황의 “답변”은 2021년 당시 신앙교리성이 발표한 선언을 사목적 관점에서 더욱 심화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교황의 “답변”은, 객관적으로 볼 때에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목적 자비는 주관적 죄책성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에 의하여 과실이나 책임이 완화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17)라는 사실을 고려하여 “한 명이나 여러 사람이 요청한, 혼인의 잘못된 개념을 전달하지 않는 축복 형식”18)의 가능성에 관한 식별로 실제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27. 이 선언의 첫머리에 인용한 교리 교육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아무 대가 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유형의 축복에 관한 설명을 제시하셨다. 조건 없이 주어지는 축복의 사목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이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읽어볼 가치가 있다. “축복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에는 축복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는데, 사람들 또한 축복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축복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축복은 그것을 받은 사람의 전 생애 동안 함께하고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에 의하여 변화되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 이처럼 하느님에게 있어 우리는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죄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고 어머니이시며, 순수한 사랑이시고, 우리에서 영원히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을 절대로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축복에 관한 내용의 성경 본문을 교도소나 재활공동체에서 읽는다면 강력한 체험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의 중대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축복을 받고 있으며 천상 아버지께서 계속 그들의 선을 원하시고 그들이 선을 향하여 마침내 마음을 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조차도 그들이 회복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버릴지라도, 하느님께 그들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입니다.”19)


28. 순례 중이거나 성지에서, 심지어 거리에서도 사제를 만날 때면 사람들이 축복을 청하러 자발적으로 다가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노인, 병자, 교리 교육이나 기도 모임 참가자, 순례자, 여행을 떠나는 사람, 자원봉사 단체와 협회 등의 사람들을 위한 일련의 축복 예식을 규정하는 전례서인 『축복 예식』을 참조할 수 있다. 그러한 축복들은 모든 이를 향하여 열려 있으며 그 누구도 이로부터 배제될 수 없다. 예를 들면, “노인 축복 예식”의 지침에는 축복의 목적이 “노인들이 하느님께 받은 은혜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룬 훌륭한 일들에 대하여 그들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정을 드리려는 것이다.”20)라고 말한다. 이 경우, 축복의 대상은 노인이고, 그를 위하여 그와 함께 그가 행한 선과 받은 호의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누구에게도 이 감사 행위를 막을 수 없고, 모든 이는 비록 창조주의 계획에 맞지 않는 상황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찬미할 만한 긍정적인 요소를 소유하고 있다.


29. 상승적 차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님의 선물과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을 자각할 때, 특히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때 죄의 상황에서도 신자의 마음은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바친다. 이러한 형태의 축복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든 다른 이와 함께든, 모든 이는 하느님께 그들의 찬미와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다.


30. 그러나 축복에 관한 대중적 의미는 하강적 축복의 가치도 포함한다. “교구나 주교회의, 또는 그 밖의 교회 조직이 모든 종류의 문제에 관한 절차나 예식을 지속적이고 공식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21)라고 한다면, 사목적 신중함과 지혜는, 성직자가 신자들 사이의 심각한 추문이나 혼란을 피하면서 결코 혼인과 비교될 수 없는 결합 안에서도 주님과 그분의 자비에 자신들을 의탁하고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며 그분의 사랑과 진리의 계획을 더 잘 이해하도록 인도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동참하도록 제안할 수 있다.


III.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과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


31. 여기에 설명된 지평 안에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과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의 가능성이 있으며, 혼인성사에 고유한 축복과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 축복의 형식에는 교회 권위가 예식으로 고정한 어떠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 경우에 주어지는 축복은 상승의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자신이 궁핍하고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신분(status)에 대한 합법화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삶과 관계 안에서 참되고 좋으며 인간적으로 유효한 모든 것이 성령의 현존으로 풍요로워지고 치유되며 고양되기를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의하여 하강하는 복의 간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축복의 형식은 하느님에 대한 탄원을 표현한다. 인간관계가 복음 메시지에 대한 충실성 안에서 성숙하고 성장하며, 자신의 불완전함과 나약성에서 벗어나 항상 더 큰 신적인 사랑의 차원 안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고전 신학에서 ‘조력 은총’(gratia actualis)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충동에서 나오는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32. 사실 하느님의 은총은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삶 안에서 작용한다. 그 은총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신비롭고 예측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칠 줄 모르는 지혜와 모성애로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모든 이를 환영하며, 모든 이가 그들의 존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만하게 이해하고 실현하도록 허락하는 영적인 도움으로써 그들을 동반한다.22)


33. 이러한 축복은 비록 전례 예식 안에 포함되지 않아도23) 전구의 기도와 겸손하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이들이 그분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기도를 하나로 묶어 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로 다가오는 이는 누구라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 결국 축복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높이는 수단을 제공한다. 축복에 대한 요청은 초월에 대한 개방성, 경건함, 삶의 구체적인 수많은 상황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친밀감을 표현하고 키워 주는데,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이것은 가로막지 말고 돌보아야 하는 성령의 씨앗이다.


34. 교회의 전례 자체는 우리의 죄와 공덕의 부족, 약점과 혼란 속에서도 이러한 신뢰의 태도로 우리를 초대한다. 로마 미사 경본에서 발췌한 매우 아름다운 이 본기도는 그것을 입증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연중 제27주일) 실제로, 그 동작으로 어떠한 것도 인정하거나 합법화하지 않는 목자의 단순한 축복을 통하여 사람들이 “저희 공로와 소망”을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까이 계심을 얼마나 자주 체험할 수 있겠는가.


35. 그러므로 성직자의 사목적 감수성은 축복 예식서에 없는 축복도 자연스럽게 실행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36. 이러한 의미에서, 예식화되지 않은 축복들이 성사와 유사한 전례 또는 준전례 행위가 되는 것을 피하고 그것을 청하는 사람들의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하는 단순한 동작으로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교황의 염려를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축복의 예식화는 대중 신심 안에서 커다란 가치를 지닌 동작을 과도한 통제하에 두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빈곤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한 통제는 사람들의 삶을 동반하는 사목 안에서 자유와 자발성을 성직자에게서 박탈할 수도 있다.


37. 이와 관련하여 이미 부분적으로 인용된 교황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떠오른다. “특정한 상황에서 사목적 신중함에 속할 수도 있는 결정이 규범이 될 필요는 없다. 곧, 교구나 주교회의, 또는 그 밖의 교회 조직이 모든 종류의 문제에 관한 절차나 예식을 지속적이고 공식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 교회법은 모든 것을 다룰 수도 없고 다루어서도 안 되며, 마찬가지로 주교회의도 여러 문헌이나 의정서로 그렇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의 삶은 규범적인 통로 외에도 수많은 통로를 통하여 나아가기 때문이다.”24) 이렇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개별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 식별은 규범의 차원으로 올라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이는 “용인할 수 없는 결의론을 이끌어 낼”25)수 있기 때문이라고 상기시켰다.


38. 이러한 까닭에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에 대한 축복을 위한 어떤 예식을 장려하거나 규정해서는 안 되지만, 단순한 축복으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모든 상황에 교회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거나 금지해서도 안 된다. 성직자는 이 자발적인 축복에 앞서 할 수 있는 짧은 기도에서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건강, 인내의 정신, 대화, 상호 도움을 간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충만하게 이룰 수 있도록 하느님의 빛과 힘을 간구할 수도 있다.


39. 어떤 경우에도 모든 형태의 혼란이나 추문을 피하기 위하여,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는 커플이 이 축복 기도를 요청하였을 때, 비록 전례서에 규정된 예식을 벗어난 표현일지라도, 이러한 축복은 절대 사회적 결합 예식과 동시에 또는 그것과 관련하여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또한 혼인의 고유한 예복이나 동작, 언어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 동성 커플이 축복을 요청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40. 반면 그러한 축복은 성지 방문이나 사제와의 만남, 기도 모임, 순례와 같은 다른 맥락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사실 전례의 고유한 예식 형태가 아니라 교회의 모성적 마음의 표현으로 대중 신심의 핵심에서 우러나는 것과 유사하게 주어지는 이러한 축복은 아무것도 합법화하려 하지 않고 단지 하느님께 자기 삶을 열고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며 복음의 가치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 간구하는 것이다.


41. 이 선언에서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에 관하여 언급된 내용은 그것과 관련하여 성직자의 신중하고 자부적인 식별을 이끌어 주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것 외에, 이러한 종류의 축복에 관한 세부 사항이나 실천 요소를 규정하는 어떤 방식에 관한 다른 답변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26)


IV. 교회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성사이다


42.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바치셨던 기도와 탄원을 계속 올리고 있으며(히브 5,7 참조),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것은 특별한 효과를 누린다.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 공동체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어머니의 사명을 자선 사업, 좋은 표양 그리고 참회의 행위로써만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도 수행하는 것이다.”27)


43.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성사이다. 그러므로 죄에 의하여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두워졌을 때도 마치 베드로가 풍랑 중에 예수님께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 하고 외친 것처럼 언제나 그분께 손을 뻗어 축복을 청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축복을 바라고 받는 것이 좋은 것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커다란 한계 속에서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겉보기에만 올바른 생활보다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28)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다. 이러한 방식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이 찬란히 빛납니다.”29)


44.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초대하는 케리그마(kerygma)를 새롭게 선포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교회는 마리아처럼 세상을 위한 하느님 축복의 중재자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며 그 축복을 받고 예수님을 모셔가며 그 축복을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세상이 스스로 줄 수 없고, 빵처럼 그리고 빵보다 더 항상 필요로 하는 자비와 평화이십니다.”30)


45. 위에서 언급된 내용을 고려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따라 본 신앙교리부는 끝으로 다음의 말씀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의 뿌리이고, 축복받았다는 것을 느끼는 능력이고 축복하는 능력입니다. …… 이 세상은 축복이 필요하고, 우리는 축복을 주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는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과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쁨, 그리고 하느님께 축복하는 법을 배우는 기쁨만이 남아 있습니다.”31) 이렇게 모든 형제자매는 교회 안에서 언제나 순례하고 언제나 간청하며 언제나 사랑받는 것과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언제나 축복받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

교리 부서 차관 아르만도 마태오 몬시뇰


2023년 12월 18일 알현에서

프란치스코


<원문 Dicastero per la Dottrina della Fede, Dichiarazione sun senso pastorale delle benedizioni Fiducia Supplicans, 2023.12.18., 영어도 참조, 이규용 번역> 

영어:

https://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ddf_doc_20231218_fiducia-supplicans_en.html

이탈리아어:

https://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ddf_doc_20231218_fiducia-supplicans_i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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