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제1회기(2023년 10월 4-29일)
종합 보고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
2023년 10월 28일, 정오
도입
사랑하는 자매와 형제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우리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주제로 2023년 10월 4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시노드 총회 제1회기에서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경험을 하였다. 세례성사로 받은 공통된 은총으로 우리는 출신과 언어와 문화가 다양함에도 한 마음, 한 정신으로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의 합창단처럼 다양한 목소리로 마음의 일치 안에서 노래하려고 노력하였다. 성령께서는 당신만이 이루실 수 있는 조화를 우리가 체험하도록 선사하셨으며 이 조화는 갈라지고 분열된 세상 안에서 하나의 선물이며 증언이다.
이 총회는, 오래 지속된 전쟁과 새로운 전쟁이 수많은 희생자에게 불합리한 참극을 낳으면서 맹위를 떨치는 세상에서 열렸다. 가난한 이들, 이민을 갈 수밖에 없는 이들, 폭력을 겪거나 기후 변화로 황폐해져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이 대중 매체뿐 아니라 이 비극적 사건들에 자신들의 가족과 민족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많은 이의 목소리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울려 퍼졌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들이 어떻게 화해와 희망과 정의와 평화의 여정을 촉진할 수 있는지 매 순간 물으면서 이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였다.
우리의 만남은 베드로의 후계자를 중심으로 로마에서 열렸으며, 교황께서는 우리를 신앙 안에서 확고히 해주셨고 우리가 담대하게 사명을 수행하도록 격려하여 주셨다. 교회 일치적 밤샘 기도로 이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이었다. 우리는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교황 성하와 더불어 여러 그리스도교 교파의 수장들과 대표자들과 함께 이 밤샘 기도를 바쳤다. 일치가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 안에 조용히 무르익었고,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눈으로 보고 기쁨으로 충만하여 여러분에게 그것을 증언한다.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32],1)
교황님의 뜻에 따라 이번 총회에는 하느님 백성의 다른 구성원들이 주교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모였다. 주교들은 그들과 함께 그리고 로마의 주교와 함께 교회들의 친교로서의 교회를 드러나게 하였다. 남녀 평신도들, 남녀 축성 생활자들, 부제들과 사제들은 주교들과 함께 온 교회와 교회 안의 모든 이를 참여시키고자 하는 과정의 증언자였다. 이들은 총회가 고립된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시노드 과정에 통합되는 부분이며 필요한 단계라는 사실을 상기하였다. 다양한 발언과 수많은 입장 속에서 시노달리타스 방식을 배우며 그것을 실현하는 데 더욱 적합한 형태들을 찾고 있는 교회의 경험이 울려 퍼졌다.
우리의 여정이 시작되고 이번 회기에 이르기까지 2년이 넘었다. 2021년 10월 9일에 시노드 과정이 시작된 이후 모든 교회는 서로 다른 단계들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교구 단계, 국가 단계, 그리고 대륙 단계에서 경청의 과정을 가졌고 그 결과들은 각 단계의 문서들에 수렴되었다. 첫 번째 회기와 함께 교회 전체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따르라고 요청하시는 길을 기도와 대화 안에서 식별하려고 이러한 자문의 결실들을 수용하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 단계는 2024년 10월까지 계속될 것이며 총회 제2회기가 이 작업을 완료하면 그때 이를 교황 성하께 드릴 것이다.
교회의 성전(聖傳)에 뿌리를 둔 이 모든 여정은 공의회 교도권의 빛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실 세상과 교회라는 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았다. 신자들의 일상생활, 모든 백성과 문화 안에서 교회들의 경험, 거룩함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 그리고 신학자들의 성찰은 그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는 토양이 되었다. 2021-2024년 시노드는 그 씨앗의 활력을 끊임없이 끌어내면서 그 잠재력을 발전시킬 것이다. 시노드 여정은 실제로 공의회가 교회를 신비라고, 거룩함으로 부름받은 하느님 백성이라고 가르친 것을 실현하여 나가고 있다. 이 여정은 세례받은 모든 이가 저마다 다양한 소명 안에서 복음을 더욱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들의 기여를 소중히 여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노드 여정은 공의회를 더욱 수용하는 참된 행위로서, 공의회의 영감을 연장하고 오늘날 세상을 위한 그 예언적 힘을 다시 발휘한다.
한 달 동안의 작업을 마치고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가 저마다의 교회로 돌아가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작업의 열매들을 전하고, 이 여정을 함께 계속하도록 부르신다. 이곳 로마에 모인 우리는 단지 몇 명에 불과하였지만, 교황께서 소집하신 시노드 여정의 의미는 세례받은 모든 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그것이 가능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종합 보고서」에 이 기간을 특징짓는 대화와 기도와 만남 안에 나타난 주요 요소들을 모았다.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어떤 책으로도 복원할 수 없는 생활 경험의 어조로 이 보고서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침묵과 경청, 나눔과 기도의 순간들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여러분에게 증언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즉각 반박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서로 다른 생각들을 경청하는 것과 자신의 발언을 절대적 확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선물로 제공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과 공유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이 우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이끌었고, 이는 우리에게 참으로 시노달리타스 경험이었다. 우리는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면서 그것을 더 잘 이해하였고 그 가치를 알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가 세례받은 이들로서 은총과 은사와 직무의 다양성 가운데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단지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세상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복음적 형제애는 등불과도 같아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아 온 집안을 비추도록 해야 한다(마태 5,15 참조). 오늘날 세상은 이러한 증언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상처받은 인류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온유함을 보여 주고 전해 주어야 하는 임무를 회피할 수 없다.
이번 회기의 작업은 「의안집」(Instrumentum laboris)이 제시한 개요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이 「의안집」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특징적인 표징들과 그 교회에 있는 친교, 사명, 참여의 역동성에 대해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였다. 제안된 질문들을 마주하면서 전체 개요의 장점이 확인되었다. 우리는 질문들의 장점을 이해하고 심화할 필요가 있는 주제들을 파악하며 제안의 첫 번째 핵심을 제시할 수 있었다. 「종합 보고서」는 「의안집」의 모든 내용을 취하거나 반복하지 않고 우선순위로 여겨지는 것들을 다시 다룬다. 이는 어떤 식으로든 최종 문서는 아니지만, 계속되어야 할 식별 과정에 봉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이 보고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시노달리타스를 비추고 그 기초를 놓는 신학적 원리들을 제안하며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얼굴’에 관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 시노달리타스 방식은 삼위일체에 대한 관상에서 생기는 신앙 안에서 행동하고 활동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일치와 다양성을 교회적 풍요로움으로 여긴다. ‘모든 이가 제자요 모든 이가 선교사’라는 제목의 제2부는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 관련된 모든 이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대하여 다룬다. 여기에서 시노달리타스는 주로 하느님 백성이 서로 연결되어 걸어가는 것으로,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봉사하는 은사들과 직무들의 풍요로운 대화로 소개된다. 제3부의 제목은 ‘관계를 엮고 공동체를 구성하기’이다. 여기에서 시노달리타스는 주로 일련의 과정, 그리고 교회들 사이의 교류와 세상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직들의 네트워크로 제시된다.
이 세 부분 각각에서, 모든 장은 수렴, 다루어야 할 질문, 그리고 대화에서 나온 제안으로 구성된다. 수렴은 성찰할 때 주목할 수 있는 고정 지점을 확인하는 것으로 여정에 방향을 제시하여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지도와 같다. 다루어야 할 질문은 신학적, 사목적, 교회법적으로 계속하여 심화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한 핵심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것들은 가야 할 방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멈출 필요가 있는 교차로와 같다. 반면 제안들은 나아가야 하는 가능한 경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어떤 것들은 제안되고 어떤 것들은 권고되며 어떤 것들은 더욱 강력하고 결단력 있게 요청된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주교회의들과 동방 가톨릭 교회의 교계 조직들은 지역 교회들과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와의 연결고리가 되면서 성찰의 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수렴에 도달한 내용에서 출발하여 질문들에, 그리고 더 중요하고 긴급한 제안들에 집중하며 그것들에 대한 신학적 사목적 심화를 도모하고 교회법적 함의를 밝히도록 초대되었다.
우리는 로마에서 공동작업을 하면서 체험한 상호경청과 진지한 대화의 분위기가 하느님 나라의 좋은 씨앗이 자라는 데 봉사하면서 우리 공동체와 온 세상에 빛나기를 마음으로 염원하며, 이 바람은 희망으로 지지된다.
제1부 –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얼굴
1. 시노달리타스: 경험과 이해
수렴
1) 우리는 교회의 시노달리타스 차원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초대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시노달리타스 실천은 신약성경에서, 그리고 초기 교회 안에서 증언되고 있으며, 여러 교회와 그리스도교 전통들 안에서 특별한 역사적 형태를 취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실천을 ‘새롭게 하였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가 이를 더욱 쇄신하도록 장려하였다. 2021-2024년 시노드 또한 이러한 과정 안에 있다. 이 시노드를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느님 말씀에 뿌리박고, 기쁨 가운데 만나는 순간들로 엮어졌으며, 때로 피곤하기도 하지만 기도하고 경청하며 말하는 이 시노달리타스 방식이,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는 더욱 깊은 인식으로 이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헤아릴 수 없이 귀한 열매는 우리가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한 것으로서, 이 백성 안에서 저마다는 세례성사에서 유래하는 품위를 지녔고 복음화의 공동 사명에 대한 공동 책임성으로 부름받았다.
2) 이 과정은 하느님의 집이며 가족인 교회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염원을 새롭게 해주었다. ‘시노달리타스’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이라는 용어들과 관련된 것은 사람들에게 더 가깝고 덜 관료적이며 더 관계적인 교회에 대한 바로 이러한 경험이고 염원이며, 그것에 대한 더 정확한 설명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그 첫 번째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젊은이들이 이미 2018년에 그들을 주제로 열린 시노드에서 바랐던 그 교회이다.
3) 바오로 6세 홀에 소그룹별로 총회 참석자들을 원탁에 배치한 것은 혼인 잔치의 성서적 표상(묵시 19,9)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이러한 배치를 포함하여 총회가 진행된 방식 자체는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와 시노달리타스의 원천이며 절정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 그 안에 문화, 언어, 예법, 사고방식, 다양한 현실이 함께 어우러져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진지한 탐구를 통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4) 전쟁, 순교, 박해, 기아로 고통받는 민족들로부터 온 형제자매들이 우리와 함께 참여하였다. 흔히 시노드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 민족들의 상황이 우리의 토론과 기도 안에 포함되었고 그들과 우리 사이에 친교의 감각이 길러졌으며 평화의 일꾼이 되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북돋웠다.
5) 총회는 이 시노드 과정에서 성령께서 교회에 쏟아주신 많은 선물 가운데에 희망, 치유, 화해, 신뢰 회복에 대하여 자주 말하였다. 교회 안에 남용의 희생자들과 상처받은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들을 동반하려는 개방성은 오랫동안 볼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많은 이들을 보게 하였다. 화해와 정의를 향하여 우리가 아직 가야 할 긴 여정은 그러한 남용을 조장한 구조적 조건들을 마주하고 구체적인 참회 행위를 수행할 것을 요청한다.
6)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의 많은 구성원에게 생소한 용어로, 어떤 이들에게는 혼란과 염려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에는 교회의 가르침이 변하여 교부들의 사도적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며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갈망하고 목말라하는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노달리타스가 살아있는 성전의 역동성을 표현한다고 확신한다.
7)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대의 민주주의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 시노드가 교회의 교계 제도적 본성을 위험에 처하게 하여 교회적 영적 특성이 결여된 다수결의 심의 기구가 될 수 있다는 몇몇 사람들의 우려에 응답하셨다. 어떤 이들은 변화를 강요당할까 두려워하고 어떤 이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살아있는 성전의 흐름에 맞추어 움직일 용기가 너무 부족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몇몇 당혹감과 반대들은 또한 권력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특권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어떤 경우이든 모든 문화적 상황에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과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는 친교, 사명 그리고 참여로 특징지어지는 교회 됨의 방식을 가리킨다. 그 예로 아마존 지역의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선교적 과정의 열매인 아마존 지역 교회 협의회(CEAMA)가 있다.
8)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온 인류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명을 지향하기 때문에 교회적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함께 모이는 것, 상호경청, 대화, 공동체적 식별, 성령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표현하는 동의 형성, 그리고 분화된 공동 책임성 안에서의 결정을 내리는 것 등을 포함한다.
9) 경험과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인식 안에서 함께 성장하였다. 요약하면 처음부터 총회는 두 가지의 확신으로 그 형태를 갖추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공유한 체험이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이며 그 모든 풍요로움과 깊이가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과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는 다양한 문화 안에서 그 다양한 차원의 의미를 더욱 다듬어 명료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료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시노달리타스의 전망이 교회의 미래를 대표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근본적인 동의가 이루어졌다.
다루어야 할 질문
10)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일반적으로 들리거나 지나가는 유행처럼 보일 위험을 피하면서 시노달리타스의 의미를 사목적 사용에서부터 신학적 교회법적 사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에서 이미 행한 성찰 작업을 시작으로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시노달리타스와 단체성의 관계처럼 시노달리타스와 친교의 관계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11) 현재 진행 중인 시노드 과정에서도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들과 라틴 전통의 만남을 촉진함으로써, 이 둘 사이의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실천과 이해의 차이를 강조하려는 바람이 있었다.
12) 특히 사람들이 공동체로서 함께 걸어가는데 익숙한 문화적 상황에서 시노달리타스 삶의 다양한 표현이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노달리타스 실천은 교회에 자리 잡은 개인주의, 분열을 조장하는 대중 영합주의, 그리고 균질화하고 단조롭게 만드는 세계화에 대한 교회의 예언적 대응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으로 충만하게 존재하고 행동하는 대안적 방법을 제공하며 이는 여러 전망을 통합하고 더욱 탐구되고 밝혀져야 한다.
제안
13) 생활한 경험의 풍요로움과 깊이는, 몇몇 사람들이 부추기는 불신과 두려움과도 같이 지금까지 나타난 참여의 방해물을 극복하면서 시노드 여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것을 우선적으로 이끈다.
14) 우리는 내년 시노드 과정에 부제들, 사제들, 주교들이 더욱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는 그들의 목소리와 경험과 기여가 없을 수 없다. 우리는 그들 중 몇몇이 시노달리타스에 저항하는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5)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이 디지털 경로를 포함하여 그들의 가족들, 또래들 그리고 목자들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통하여 시노달리타스 문화가 더욱 세대 간 문화가 되도록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풍부한 연구 유산을 활용하여, 특히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의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2017년)와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2014년)을 활용하여 총회의 제2회기 이전에 시노달리타스의 근본 원리와 실천에 대한 용어적 개념적 차원을 심화시키는 신학적 작업을 담당 부서에서 증진할 것을 제안한다.
17) 시노달리타스 전망에 대한 교회법적 함의 또한 명료하게 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대하여 총회의 제2회기를 염두에 두고 대륙 간 특별위원회를 신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로 구성하도록 제안되었다.
18) 『교회 법전』과 『동방 교회 법전』의 개정을 위한 때가 온 것 같다. 따라서 예비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2. 성삼위에 의하여 소집되고 파견됨
수렴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상기하는 것처럼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교회 헌장 4항)이다. 성부께서는 성부를 보내시고 성령을 선사하심으로써 우리를 ‘나’에서 ‘우리’로 나아가고 세상에 봉사하게 하는 친교와 사명의 역동성에 참여시키신다.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께서 인류와 만나시는 삼위일체적 역동을 영적 태도와 교회적 과정으로 표현한다. 이를 위하여 세례받은 모든 이는 자신의 소명과 은사와 직무를 상호성 안에서 수행하는 데 헌신하여야 한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방식으로 모든 인간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과 참된 ‘대화’를 할 수 있다(「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 67항 참조).
2) 교회의 시노드 여정은 그 기원부터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있으며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때 충만한 성취에 이를 것이다. 교회적 형제애의 증언과 가장 작은 이들에게 봉사하려는 선교적 헌신은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고 도구이기도 하지만 결코 그 신비에 미치지는 못한 것이다. 교회는 자신을 선포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록 구조적으로 불완전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더 잘 봉사하려고 본연의 시노달리타스 모습을 성찰한다.
3)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쇄신은 오직 은총의 우선성을 인정함으로써 가능하다. 영적 깊이가 부족하다면, 시노달리타스는 겉모습만 쇄신된 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름받은 것은, 다른 곳에서 얻은 성숙한 영적 경험을 공동체적 과정으로 전환하는 것뿐만 아니라 형제적 관계들이 어떻게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의 장이자 형태가 되는지 더욱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전망은 성전의 풍요로운 영적 유산을 길어 올리면서도, 그 형태들, 곧 참여에 열려 있는 기도, 함께 경험하는 식별, 나눔에서 생겨나 봉사로 빛을 발하는 선교 에너지의 형태들을 쇄신하는 데에 기여한다.
4) 성령 안에서 대화가 한계는 있지만 진정한 경청을 가능하게 하고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식별하기 위한 풍요로운 도구이다. 그 실천은 기쁨과 놀라움과 감사를 불러일으켰고 개인과 집단과 교회를 변화시키는 쇄신의 여정으로 경험되었다. ‘대화’(conversazione)라는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dialogo) 이상의 무엇을 표현한다. 곧 조화로운 방식으로 생각과 감정을 섞어 공통의 활기 있는 세상을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대화 안에는 회심이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학적 실재로서, 민족과 문화는 공동체를 위하여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결정하고자 모여 연대하는 실천을 통하여 단단히 결합한다. 은총은 이러한 인간적 경험을 완성으로 이끈다. 곧 ‘성령 안에서’ 대화한다는 것은 신앙의 빛 안에서, 그리고 성령께서 당신의 틀림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참으로 복음적인 분위기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함께 찾으면서 나눔의 경험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5) 시노달리타스가 사명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자기 준거성(self-referentiality)과 자기 보존성(self-preservation)의 위험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 상실의 위험을 피하면서 다른 종교와 신념과 문화에 속한 모든 이와 형제애를 나누어야 한다.
다루어야 할 질문
6) 성부의 뜻에 참으로 귀를 기울이려면 성령의 자유와 새로움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히브 10,10)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교회적 식별의 기준을 신학적 관점에서 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성경이 증언하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성전과 교회 가르침의 수용, 그리고 시대의 징표를 예언적으로 읽는 것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해야 한다.
7) 따라서 이성과 감정 사이의 모든 환원주의나 이분법을 극복하면서 신앙 경험의 지성적 차원과 감정적 차원을 나란히 놓기보다 통합할 수 있는 인간학적 영적 전망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8) ‘보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구조를 따르면서 또는 ‘인식하고, 해석하고, 선택한다’는 과정을 명확히 하면서 실현되는 교회적 식별의 여러 모델에 비추어 볼 때도, 성령 안에서의 대화가 어떻게 신학 사상과 인문학적 사회학적 공헌을 통합할 수 있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9) 거룩한 독서와, 고대와 현대의 다양한 영적 전통들이 식별의 실천에 줄 수 있는 기여를 발전시켜야 한다. 사실 성령께서 수 세기 동안 제안하였고 교회의 영적 유산에 속하는 많은 형태와 방법과 기준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제안
10) 문화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영적 전통의 풍요로움을 소중히 여기면서 성령 안에서 대화와 교회의 삶 안에서 식별의 여러 형태를 체험하고 적용하도록 제안한다.
11) 각 지역 교회는 교회적 식별 과정을 촉진하고 동반하고자 적합하고 준비된 사람들을 갖추도록 권한다.
12) 구체적인 교회 생활을 밝히기 위해서는 사목적 환경 안에서도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식별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실천은 단순한 활동 계획을 넘어 공동체 안에 현존하는 은사들을 더 잘 인식하고 지혜롭게 과제와 직무를 맡기며 성령의 빛 안에서 사목적 여정이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3. 신앙 공동체 안에 들어가기: 그리스도교 입문
수렴
1) 그리스도교 입문은 주님께서 교회의 직무를 통하여 우리를 파스카 신앙으로 인도하시고 삼위일체적 교회적 친교 안으로 이끄시는 여정이다. 그러한 여정은 그 시작된 시대, 그리고 동방 전통과 서방 전통이 각각 강조하는 바의 차이에 따라 의미 있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회개의 삶, 전례 거행과 더불어 공동체와 그 사명에 참여가 언제나 서로 얽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점진적 단계와 절차를 거치는 교리교육 여정은 함께 걸어가는 모든 교회적 여정의 패러다임이다.
2) 입문을 통하여 교회적 소명과 직무의 커다란 다양성을 접하게 된다. 그것들 안에서 교회는, 교회의 자녀들과 함께 걸어가며 그들에게 걷는 법을 가르치는 어머니다운 얼굴을 나타낸다. 자녀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의구심과 질문에 응답하면서 교회는, 각 사람이 자신의 역사와 언어와 문화를 통하여 가져오는 새로움으로 풍요로워진다. 이러한 사목적 활동 안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흔히 이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해도 시노달리타스의 첫 번째 형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3) 은사와 직무의 구별에 앞서, “우리는 ……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그러므로 세례받은 모든 이 사이에는 품위의 진정한 동등성과 사명을 위한 저마다의 소명에 따른 공동 책임성이 있다.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1요한 2,27 참조) 성령의 도유로 모든 믿는 이는 복음의 진리를 위한 본능을 지니며, 이 본능은 신앙 감각(sensus fidei)이라고 부른다. 이는 신적 실재와의 어떠한 공동 본성과 신앙의 진리에 부합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구성된다. 시노드 과정들은 이러한 선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어떤 특정 교리나 실천이 사도적 신앙에 속하는지 결정하는데 확실한 기준을 구성하는 신자들의 동의(consensus fidelium)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게 해준다.
4) 견진성사는 오순절의 은총을 교회 안에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하게 한다. 이는 성령의 충만한 선물로 신자들을 풍요롭게 하며 사명에 봉사하는 데에 세례성사로 말미암은 공동 품위에 근거한 저마다의 고유한 소명을 발전시킬 것을 요청한다. 그 중요성은 최대한 강조되어야 하고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얼굴을 드러내는 다양한 은사들과 직무들 사이의 관계 안에 놓여야 한다.
5) 성체성사의 거행, 특히 주일 성체성사의 거행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모이고 만나는 일차적이며 근본적인 형태이다. 간절히 바라지만 성체성사가 가능하지 않은 공동체는 말씀의 전례를 중심으로 모인다.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신비를 거행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가 서로 그리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신다. 사도 바오로가 친교(koinonia)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서 출발하여(1코린 10,16-17 참조) 그리스도교 전통은 성체성사에 온전한 참여, 그리고 신자들 사이와 교회들 사이 관계의 본질을 가리키기 위하여 이 ‘친교’라는 단어를 보존하여 왔다. 이 단어는 하느님의 생명에 대한 관상을 삼위일체 신비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열어주면서 우리 관계의 일상생활을 가리킨다. 곧 우리가 서로에게 자신을 여는 가장 단순한 몸짓에서 참으로 성령의 숨결이 순환한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에서 거행되고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친교는 시노달리타스의 과정들을 이루며 이를 이끈다.
6) 성체성사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다수성, 성사적 신비의 일치와 전례 전통들의 다양성, 거행의 일치와 성소, 은사, 직무의 다양성 등 일치와 다양성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조화는 단순히 획일성이 아니며 모든 교회의 선물은 공동의 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성체성사보다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다루어야 할 질문
7)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논리에서 벗어나 분리된 방식으로도 개인주의적 방식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입문에 대한 더욱 통일된 시각이 시노달리타스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바를 더욱 심화할 필요가 있다.
8) 신앙 감각이 성숙하려면 세례성사를 받을 뿐만 아니라 참된 제자 됨의 삶 안에서 성사의 은총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우리가 문화적 조건의 결실인 지배적 사고의 표현으로부터 또는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 온갖 경우로부터 성령의 활동을 식별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적합한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심화하여야 할 주제이다.
9)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성찰은 성령의 은총이 오순절의 조화 속에서 다양한 선물들과 은사들을 표현하는 견진성사에 대한 이해를 쇄신하는 데에 어떤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교회의 다양한 경험들에 비추어 볼 때에 모든 신자들 안에 공동체 건설과 세상 안에서 사명과 신앙의 증언에 대한 부르심을 일깨울 수 있도록 이 성사의 준비와 거행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 연구되어야 한다.
10) 사목 신학적 관점에서 예비 신자 교리 교육 활동의 논리(logica catecumenale), 혼인성사 준비나 직업적 사회적 임무 선택에 대한 동반이나 수품 직무자의 양성 등 교회 공동체 전체가 관여해야 할 다른 사목적 여정들을 비출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안
11) 성체성사가 시노달리타스를 형성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단계는 선물에 합당한 거행 방식과 참된 형제애로 그 은총을 기려야 한다. 진정성 있게 거행되는 전례는 제자 됨과 형제애의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학교이다. 모든 양성은 그 시작에 앞서 전례 행위의 강력한 아름다움과 고귀한 단순함에 의하여 우리 자신이 양성되도록 해야 한다.
12) 두 번째 단계는 매우 많은 곳에서 제기되었던 요청으로, 신자들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문화의 다양성에 더욱 토착화된 전례적 언어의 필요성이다. 전통과의 연속성과 전례적 양성의 필요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성찰과 주교회의에 더 큰 책임을 자의 교서 「대원칙」(Magnum Principium)에 따라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성찰할 것을 촉구한다.
13) 세 번째 단계는 미사 거행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형태의 공동체 기도를 소중히 여기는 사목적 헌신이다. 지역 문화의 특성이 반영된 대중 신심의 실천과 같은 전례 기도의 다른 여러 표현은 모든 신자의 참여를 촉진하고 교회와의 덜 친밀한 이들을 점차 그리스도교적 신비 안으로 이끌며 주님과의 만남에 가까이 가도록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대중 신심의 형태들 가운데에 성모 신심은 많은 이들의 신앙을 지탱하고 키워 준다는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4. 가난한 이들, 교회 여정의 주역들.
수렴
1) 가난한 이들은 교회에 사랑을 간구한다. 사랑은 존중과 환대와 인정을 뜻한다. 사랑이 없다면 음식과 돈, 또는 사회적 돌봄의 제공이 물론 중요한 도움의 형태를 나타내지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온전한 사명을 실현하지는 못한다. 존중과 인정은 개인의 능력을 실현하는 강력한 도구들로 모든 사람이 다른 이들의 도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위한 여정의 주체가 되게 한다.
2)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그리스도론적 신앙에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겸손한 분으로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셨고 가난한 이들과 같이 걸으셨으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가난의 원인을 비난하셨다.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적, 사회학적, 정치적, 철학적 범주이기 이전에 신학적 범주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를 가장 먼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베푸셨다. 하느님의 이 우선적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필리 2,5)을 기르도록 부름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3) 한 가지 형태의 가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많은 이들의 얼굴 가운데 품위 있는 삶을 사는 데에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한 이들의 얼굴도 있다. 그리고 이주민과 난민, 원주민, 아프리카계와 그 후손들, 특히 여성들을 비롯하여 폭력과 남용의 희생자들, 중독자들, 조직적으로 발언권을 박탈당한 소수자들, 버려진 노인들, 인종차별과 착취, 학대의 희생자들, 특히 미성년자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도 있다. 취약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지속적 지지가 필요한 가장 취약한 이들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태아들과 그 어머니들이다. 총회는 여러 대륙의 많은 나라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전쟁과 테러로 생겨난 ‘새로운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인식하며 그 원인이 되는 정치, 경제 체제를 단죄한다.
4) 이 세상에는 물질적 가난의 다양한 형태들과 더불어 삶의 의미가 부족한 영적 가난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자신에 대한 과도한 염려는 다른 이들을 하나의 위협으로 보고 개인주의 안에 자신을 가두어 버릴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합심할 때 서로의 필요에 대한 답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망을 구체화하는 함께 걸어가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의 복음적 참된 행복의 더욱 충만한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5) 가난한 이들 곁에 있다는 것은 또한 그들과 함께 공동의 집을 돌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땅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은 같은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시노드 총회 작업 개막과 동시에 발표한 교황 권고 「하느님을 찬미하여라」(Laudate Deum)에서 강조한 것처럼, 대응의 부족은 생태적 위기를 불러오고 특히 기후 변화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기후 변화에 더 많이 노출된 나라의 교회들은 방향 전환의 시급성을 더욱 생생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지구의 다른 교회들의 여정에 대한 그들의 기여를 보여준다.
6) 교회는 가난과 배척의 원인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거기에는 가난하고 배척당한 이들의 권리를 돌보는 행동이 포함되며, 개인과 정부, 기업 또는 사회 구조에 의하여 저질러진 불의에 대한 공개적 비난이 필요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들의 요구와 관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사용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7)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사회 교리에서 영감을 얻고 시민 사회 단체, 노동조합, 대중 운동, 민중 연합, 정치 분야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일하면서 공동선을 건설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그들의 활동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그들의 활동은 복음 선포라는 교회의 사명에 속하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협력하는 일이다.
8)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몸을 만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다(2코린 8,9 참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의 이웃이 되는 것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우도록 부름받았다. 시노드를 개최한다는 것이 길이신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한다면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의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 교회는 그들의 고통을 통하여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알게 된다(「복음의 기쁨」[Evangellii gaudium], 198항 참조). 가난한 이들의 삶이 주님의 삶과 닮았기 때문에 그들은 선물로 받은 구원의 선포자가 되고 복음의 기쁨의 증거자가 된다.
다루어야 할 질문
9) 이 세상 어떤 곳에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는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가난한 그런 교회가 있다. 지속적으로 주의 깊게 피해야 할 위험은 가난한 이들을 ‘그들’과 ‘우리’라는 용어로 교회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 양 여기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중심에 두고 그들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교회가 언제나 더욱더 실행해야 할 일이다.
10) 불의한 상황에 대한 예언적 비난과 외교에 의지하여야 하는 정치적 의사 결정자들에 대한 압력 행사는 명철함과 성과를 잃지 않도록 역동적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 교회 기관이 공적 또는 사적 자금을 사용하는 것이 복음의 요청에 따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1) 교육, 의료, 사회 복지 분야에서 어떤 차별이나 배척이 없는 활동은 교회와 사회 안에서 가장 작은 이들의 통합과 참여를 촉진하는 교회의 분명한 표징이다. 이 분야에서 활동 조직들은 자신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표현으로 여기고 사랑이 비인격화되는 것을 피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들은 또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다른 이들과 협력하도록 권장받는다.
12) 교회는 자신의 일관성을 온전히 증언하고자 교회와 관련된 기관들에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정의의 요청이 어떻게 존중되는지 정직하게 검토해야 한다.
13)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서 연대감은 다양한 지역의 지역 교회들 사이에 선물 교환과 자원의 공유라는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는 교회의 일치를 촉진하면서 관련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사이에 유대를 형성한다. 사제가 부족한 교회에 도움을 주는 사제들은 단지 기능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그들을 파견하고 그들을 받아들인 교회의 성장을 위한 자원이 되도록 보증하는 조건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지원이 복지체계남용으로 변질되지 않고 참된 복음적 연대를 촉진하며 투명하고 믿을만한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관리되어야 한다.
제안
14) 교회의 사회 교리는 너무나도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루어야 한다. 지역 교회들은 사회 교리의 내용을 더 잘 알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영감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을 통하여 그 내용이 수용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15)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의 만남, 삶의 나눔, 그들에 대한 봉사의 경험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제공하는 모든 양성 과정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 한다. 곧, 선택이 아니라 신앙의 요청이다. 이것은 특히 수품 직무자와 축성 생활 후보자에게 적용된다.
16) 부제 직무에 대한 재검토의 일환으로, 이 직무의 방향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더욱 결정적으로 향할 수 있도록 장려되어야 한다.
17) 교회의 가르침과 전례, 실천에서 통합적 생태학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기초들이 더욱 명시적이고 신중하게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5.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으로부터 하나의 교회
수렴
1) 그리스도인들은 특정 문화 속에 살면서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그 문화 안에 그리스도를 전한다. 또한 사랑의 봉사에 투신하면서 이미 모든 장소와 시간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겸손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묵시 5,9)에서 하나의 교회가 된다.
2) 교회가 속한 문화적 역사적 지역적 맥락들은 다양한 영적 물질적 필요들을 드러낸다. 이러한 필요들은 지역 교회의 문화와 선교의 우선적 과제, 지역 교회가 저마다 시노드적인 대화로 가져오는 염려와 선물,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들을 형성한다. 총회에서 우리는 교회가 존재하는 표현의 다양성에 관한 직접적이며 대체로 기쁨에 찬 경험을 할 수 있었다.
3) 교회들은 점점 더 다문화와 다종교 상황에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함께 종교와 문화 사이의 대화를 위한 노력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려면 다리를 놓고 상호 이해를 키우고자, 그리고 동행하며 경청하고 배우는 복음화에 헌신하고자 노력하는 현존과 봉사와 선포의 방식이 필요하다.
4) 이민은 지역 교회들을 문화 간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로 재구성하는 현실이다. 이주민들과 난민들은,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뿌리뽑힘과 전쟁, 폭력으로 상처를 입지만, 그들을 환대하는 공동체의 쇄신과 풍요를 위한 원천이 되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교회들과 직접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곤 한다. 이주민에 대하여 점점 더 적대적인 태도에 직면하여 우리는 열린 환대를 실천하고 삶의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데 그들과 동반하며 민족들 가운데 문화 간 참된 친교를 건설하도록 부름받았다. 이주민들의 전례 전통과 종교적 관습에 대한 존중은 진정한 환대의 중요한 부분이다.
5) 선교사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그들의 헌신은 복음의 힘에 대한 훌륭한 증언이다. 그러나, ‘선교’가 오늘날 친교를 방해하는 고통스러운 역사적 유산을 담고 있는 단어라는 맥락에서는 특별한 주의와 민감성이 필요하다. 어떤 곳에서는 복음의 선포가 식민지화, 심지어 집단 학살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복음화는 자행된 잘못을 인정하고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민감성을 익히며 식민주의를 넘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세대와 동반해야 한다. 존중과 겸손은 우리가 서로를 보완하고,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의 만남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생활과 생각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근본적인 태도이다.
6) 교회는 모든 민족들 사이에 친교를 구축하는 일환으로 종교 간 대화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그 실천을 장려한다. 사회 정의, 평화, 화해, 공동의 집에 대한 돌봄을 지향하는 조화롭고 형제적인 연대 안에서 인류의 일치, 그 공동의 기원과 공동의 운명에 대한 증언은 폭력과 분열의 세상에 점점 더 절실해진다. 교회는, 성령께서 모든 종교와 신념과 문화에 속한 모든 이의 목소리를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루어야 할 질문
7) 교회가 존재하는 다양한 표현의 풍요로움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교회 전체 차원과 그 지역적 뿌리내림 사이, 그리고 교회 일치의 유대에 대한 존중과 다양성을 숨 막히게 하는 동질화의 위험 사이에서 역동적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 의미와 우선순위는 다양한 상황에 따라 다르며, 이를 위하여 탈중앙화 형태와 중간 형태들을 구별하고 촉진하여야 한다.
8) 교회도 전례 생활과 윤리적 사회적 신학적 성찰과 같은 중요한 영역에서 양극화와 불신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그 원인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친교와 화해를 활성화하는 용기 있는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
9) 우리 지역 교회에서 때로는 복음화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들, 곧 삶의 증언, 인간 발전을 위한 노력, 신앙 및 문화와 대화, 그리고 복음의 명시적 선포에 초점을 맞춘 방식들 사이에서 긴장을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 선포와 각 문화에 이미 포함된 복음적 특징(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찾아 각 문화의 특성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것 사이에도 긴장이 나타난다.
10) 다루어야 할 문제로 복음의 메시지와 복음 선포자의 문화 사이에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11) 점점 더 강력한 무기의 거래와 사용으로 충돌이 증대되면서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충돌을 다룰 수 있는 더욱 세심한 성찰과 양성에 대한 문제가 여러 그룹에서 제기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통하여 오늘날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여이다.
제안
12) 매우 다양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쉽게 접근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말하려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문제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3) 탈중앙화 형태들을 시험하려는 관점에서 관련된 모든 행위자와 그들의 역할을 식별하면서 관리와 평가를 위한 공유된 기준의 틀을 정해야 한다. 일관성을 위하여 분권화에 관한 식별 과정들은 다양한 차원에 관련된 모든 행위자의 기여와 동의를 염두에 두면서 시노달리타스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14) 토착민들에게 또는 그들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걷는다는 전망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사목적 헌신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모든 수준에서 그들의 참여는 더욱 활기차고 선교적인 교회가 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15) 총회 작업을 통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교도권의 가르침과 교회의 사회 교리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더욱 잘 알아야 한다는 요청이 제기되었다. 우리는 친교를 이루는 교회들의 교회, 봉사와 대화에 효과적인 교회가 되고자 우리의 다양한 전통들에 대하여 더욱 잘 알아야 한다.
16) 이주민과 난민의 수는 늘어가는 한편, 그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줄어들고 외국인에 대한 의심의 시선이 점점 짙어지는 이 세상에서 교회는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에 맞서 싸우면서, 특히 사목적 양성 계획에서 대화와 만남의 문화를 교육하는 데에 결단력 있게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이민자 통합을 위한 계획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17) 우리는 인종 관련 정의에 관한 대화와 식별에 새롭게 헌신할 것을 권고한다. 교회 안에 인종적 불의를 조성하거나 유지하는 체계를 식별하고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인종 차별의 죄를 근절하기 위하여 그로 인하여 고통받는 이들을 도와주면서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
6. 동방 교회들과 라틴 교회의 전통들
수렴
1) 동방 교회들 가운데 베드로의 후계자와 충만한 친교를 이루는 교회들은 전체 교회를 매우 풍요롭게 하는 전례적, 신학적, 교회적, 교회법적 고유성을 갖는다. 특히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그들의 경험은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귀중한 기여를 할 수 있다.
2) 역사 안에서 이들 교회에 보장된 자율성의 수준은 여러 단계를 거쳐왔다. 또한 이 역사에서, 지금은 라틴화처럼 뒤떨어졌다고 여겨지는 태도들도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이들 교회의 특수성, 구별성, 자율성에 대한 인정은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3) 동방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서방 라틴 교회 신자가 대다수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은 사목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현재의 양상이 계속되거나 증가한다면 교회법적 관할 지역에서보다 디아스포라에 있는 동방 가톨릭 교회들의 구성원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이주 국가들에서 동방 교계 제도를 구성하는 것만으로는 여러 이유로 문제 해결에 충분하지 않으며, 라틴 예법을 따르는 지역 교회들은 이주해 온 동방 교회 신자들을 시노달리타스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의 특별한 유산을 동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다루어야 할 질문
4) 동방 가톨릭 교회가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기여할 수 있는 바에 대하여 더욱 연구해야 한다.
5) 자치 교회들의 시노드에서 선출된 주교들에게 해당 영토에 대한 교황의 동의와 교회법적 영토 밖의 주교들에 대한 교황의 임명과 관련하여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남아있다. 총대주교의 재치권을 그의 영토 밖으로까지 확장하여 달라는 요청도 교황청과의 대화를 통하여 식별할 문제이다.
6) 다양한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이 있는 지역에서는 다양성 안에서 효과적인 일치를 가시적이며 체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7) 동방 가톨릭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의 일치를 향한 여정에 기여할 수 있는 것과 종교 간 그리고 문화 간 대화에서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하여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제안
8) 무엇보다도 교황 성하께 동방 가톨릭 교회의 총대주교와 대주교 평의회를 설립하여 달라는 요청이 있다.
9) 일부 사람들은 동방 가톨릭 교회들과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 전쟁과 대규모 이주 상황에서의 사목적 교회법적 도전을 다루는 시노드 특별 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청한다.
10) 심화할 문제들을 연구하고 여정을 계속하기 위한 제안들을 발전시키고자 동방과 서방의 신학자, 역사학자, 교회법 학자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11) 로마 교황청 부서에 동방 가톨릭 교회 구성원들을 적합하게 대표하는 이들이 그들의 관점을 가지고 전체 교회를 풍요롭게 하고 드러난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고자 다양한 수준에서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
12) 동방 교회 신자들의 유산을 존중하며 수용하는 형태를 조성하려면 디아스포라에 있는 동방 교회 성직자와 라틴 교회 성직자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고 서로의 상호 인식과 저마다의 전통에 대한 인정을 증진할 필요가 있다.
7.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향하여
수렴
1) 시노드 총회 이번 회기는 교회 일치의 표징 속에 열렸다. ‘함께’한 밤샘 기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다양한 그리스도교적 친교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는 신앙의 일치와 선물 교환의 정신 안에서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의지의 분명하고 믿을만한 표징이었다. 또한 매우 의미 깊은 이 기도는, 우리가 교회 일치의 때(kairos)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고 우리를 일치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다시 선언하게 하였다. 실제로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5-6).
2) 시노달리타스의 기초인 세례성사는 교회 일치의 토대를 구성한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앙 감각에 참여하며, 이러한 이유로 시노드 총회가 그 식별 과정에서 하였듯이 그들의 전통과 관계없이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교회 일치적 차원이 없다면 시노달리타스도 있을 수 없다.
3) 교회 일치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적 쇄신의 문제이고 회심과 기억의 치유 과정도 요청한다. 우정과 기도,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에 대한 헌신을 함께 하는 다양한 교회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의 빛나는 증언이 총회에서 울려 퍼졌다.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헌신은 유대를 굳건히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를 이미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교회 일치 운동이 일상생활에서 발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신학적 제도적 차원의 대화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끈기 있게 유대를 엮어가는 일은 신뢰와 개방성이 커지는 분위기 속에서 계속된다.
4) 세계의 적지 않은 지역에는 무엇보다도 피의 교회 일치 운동이 있다. 곧 소속이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함께 생명을 바치고 있다. 그들이 행하는 순교의 증언은 그 어떤 말보다도 더욱 설득력이 있다. 일치는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온다.
5)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의 협력은 우리 시대의 사목적 도전들을 마주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은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복음의 소리가 더 큰 힘을 갖게 해주고, 빈곤의 상황에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서로 힘을 합하여 봉사하게 만든다. 이는 증오와 분열, 그리고 집단과 민족과 국가를 대립시키는 전쟁 등의 문화를 치유하는 데에 어디에서든 항상 근본적인 자원이다.
6) 서로 다른 교회 또는 개신교 공동체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결혼(혼종혼)은 친교의 지혜가 성숙할 수 있고 서로를 복음화할 수 있게 한다.
다루어야 할 질문
7) 그리스도교 교파마다 시노드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을 이번 총회에서 알 수 있었다. 동방 정교회의 경우, 시노달리타스가 좁은 의미에서는 오직 주교들이 가진 권위의 단체적 행사(거룩한 시노드)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 모든 신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개신교 공동체들에서의 관행에 대한 언급도 부족하지 않았기에 우리의 논의가 풍성해졌다. 이 모든 것에 관한 심화 연구가 필요하다.
8) 심화해야 할 또 다른 주제는 상호 의존성 안에서 (지역적, 관구적, 보편적) 다양한 수준에서 시노달리타스와 수위권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극복하고자 역사를 공동으로 다시 읽을 것을 요청한다. 진행 중인 교회 일치적 대화들은 제1천년기의 실천에 비추어 볼 때 시노달리타스와 수위권이 서로 연결되고 상보적이며 불가분리적인 실재라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었다. 이 민감한 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서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에서 바라신 대로 베드로의 직무를 일치에의 봉사로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9) 성체성사적 환대(commnucatio in sacris, 성사 교류)의 문제는 성사적 친교와 교회적 친교 사이의 관계에 비추어 신학적, 교회법적, 사목적 관점에서 더 탐구해야 한다. 이 주제는 특별히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에 속한 부부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는 혼종혼에 대한 더욱 폭넓은 성찰도 요청한다.
10) 또한 원래 가톨릭 신자였던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있는 ‘무(無)교파적’(non denominazionali) 공동체와 그리스도교적 영감을 받은 ‘부흥’ 운동 현상에 대한 성찰도 촉구되었다.
제안
11) 2025년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일치시키는 신경을 만든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1700주년을 기념한다. 이 공의회를 공동으로 기념하는 것은 대립된 문제들을 과거 공의회에서 어떻게 함께 논의하고 해결하였는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12) 같은 해 2025년에 하느님의 섭리로 부활 대축일은 모든 그리스도교 종파에서 같은 날이 될 것이다. 총회는 우리의 주님, 우리의 생명, 우리의 구원이신 분의 부활을 같은 날 기념할 수 있는 날로 부활 대축일을 공동으로 정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13) 또한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하여 모든 차원의 가톨릭 시노드 여정에 참여시키고 2024년 총회 다음 회기에 더욱 많은 형제 대표들을 초대하기를 바라고 있다.
14) 몇몇 사람들은 현대 세계에서 공동의 사명에 대한 교회 일치적 시노드를 개최할 것을 또한 제안하였다.
15) 교회 일치적 순교록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다.
제2부 – 모두 제자며 모두 선교사
8. 교회는 사명이다.
수렴
1) 교회는 하나의 사명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교회가 사명이라고 우리는 선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교회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분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받는다. 성령의 지원과 인도를 받아 교회는 예수님의 사명에 근거하여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면서 복음을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한다.
2)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는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에게 교회의 사명에 대한 책임을 부여한다. 남녀 평신도들, 남녀 수도자들, 그리고 수품 직무자들은 동등한 품위를 갖는다. 이들은 다양한 은사와 성소를 받았고 서로 다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며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에 의해 부름받고 길러진다. 이들은 복음화의 감미롭고 위안이 되는 기쁨을 경험하는 지역공동체의 형제적 활기 속에서 모두 제자요 선교사이다. 공동 책임성의 훈련은 시노달리타스를 위한 본질적이며 교회의 모든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저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나의 사명이다.
3) 가정은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둥이다.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가족 안에서 살고 신앙을 공유하는 모든 이는 첫 번째 선교사들이다.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정은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실천에 대한 교육의 특권적 장이고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동반이 필요하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 사명에 봉사할 때도 일과 가정 생활의 요구를 조화시켜야 하는 부모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지원이 필요하다.
4) 사명이 교회 전체에 책임을 부여하는 은총이라면 평신도들은 일상의 더욱 통상적인 모든 환경과 상황에서 그 사명을 실현하는 데에 중요한 방식으로 기여한다. 무엇보다도 디지털 환경의 문화 안에 교회를 현존케 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바로 이들이다. 디지털 문화는 온 세상에, 젊은이들의 문화, 노동과 경제, 정치와 예술과 문화, 학문적 탐구와 교육, 그리고 양성 등의 영역, 공동의 집을 돌봄에서, 특히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 자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은 일상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른 이들과 명시적으로 신앙을 나누도록 부름받았다. 특히 젊은이들은 예수님과의 우정 안에서 성장하면서 자신들의 은사와 약함을 가지고 또래들 사이에서 복음의 사도가 된다.
5) 평신도들은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봉사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고 능동적으로 활동한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사목적 공동체를 조직화고 활성화하며 신앙의 교육자, 신학자요 양성자, 영적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 그리고 교리 교육자로서 봉사하고 본당과 교구의 다양한 단체에 참여한다. 많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과 교회의 사명은 교리 교사들에게 달려있다. 아울러 평신도들은 보호(safeguarding)와 행정 영역에서도 봉사한다. 이들의 공헌은 교회의 사명에 있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필요한 역량을 습득하도록 돌보아야 한다.
6) 평신도들이 받은 다양한 은사는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로 이 선물들이 드러나게 해야 하며 그 충만한 가치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평신도들이 사제들의 부족함을 채우도록 부름받을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 그들의 사도직이 고유하게 갖는 평신도적 특성이 약화될 위험도 있다. 또 다른 상황에서는 사제가 모든 일을 다 하고 평신도들의 은사와 직무가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또한 총회에서 많은 이들이 말한 것처럼, 하느님 백성 안에서 불평등과 분열을 영속시키는 일종의 평신도 엘리트주의가 생겨나면서 평신도들의 ‘성직자화’의 위험도 발생한다.
7) ‘만민에게’(ad gentes) 선교 실천은 교회들을 서로 풍요롭게 만드는데, 이는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가 관여하기 때문이며, 공동체는 기도와 재물의 나눔과 증언을 하도록 권장된다. 사제가 부족한 교회들도 이 일을 포기하면 안 되며, 수품 직무자의 성소가 많은 교회들은 참된 복음적인 논리에서 사목적 협력에 개방적일 수 있다. 모든 선교사들 - 남녀 평신도, 남녀 수도자, 부제와 사제, 특히 선교단체 구성원과 ‘신앙의 선물(fidei donum)’인 선교사 등 - 은 그들 자신의 성소로 인하여 지식의 유대와 선물의 교환을 이루는 데 중요한 자원이다.
8) 교회의 사명은, 특별히 교회의 공동체적이며 선교적 특성을 강조할 때 성체성사 거행을 통하여 계속해서 쇄신되고 자양분을 얻는다.
다루어야 할 질문
9) 선교적 전망에서 은사와 직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끊임없이 심화할 필요가 있다.
10)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이후 교도권은 평신도의 뚜렷한 사명을 현세적 세속적 실재들의 성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구체적인 사목적 실천에서 본당, 교구, 특히 최근에는 보편적 차원에서도 평신도들에게 교회 내 임무와 직무를 점점 더 맡기고 있다. 신학적 성찰과 교회법 규정은 이러한 중요한 발전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교회 사명에 대한 일치의 개념을 손상시킬 수 있는 이분법을 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1) 우리는 세례받은 모든 이들의 사명에 대한 공동 책임성을 증진하면서 장애인들의 사도적 능력을 인정한다. 우리는 복음화를 위하여 인류가 가진 거대한 풍요로움으로부터 오는 기여를 소중히 여기기를 원한다. 또한 때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자체 안에서도 겪은 그들의 고통, 소외, 차별의 경험을 인정한다.
12) 사목 구조들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선교적 역동성에 평신도들을 참여시키면서 공동체가 평신도들의 은사들과 직무들을 드러나게 하고 인정하며 활성화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재조직화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목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사람들을 파견할 수 있고 또 파견된 이들을 지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자들이 자신들 내부 활동과 조직적 필요성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지 않고 주로 사회, 가정, 직장 생활에서의 사명 수행에 봉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3) 「의안집」에서 사용한 ‘온전히 직무적인 교회’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하려면 그 의미를 심화할 필요가 있다.
제안
14) 지역 교회의 필요에 기반하여 직무자들을 교육하는 데에 젊은이들의 특별한 참여와 함께 더 많은 창조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기존 독서직 직무를 더욱 확대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직무는 이미 오늘날 전례 거행에서 수행하는 역할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느님 말씀의 참되고 고유한 직무를 설정할 수 있고 적절한 상황에서는 설교 또한 포함될 수 있다. 또한 가정생활을 지원하고 혼인성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동반하도록 결혼한 부부에게 부여할 수 있는 직무를 만들 가능성도 모색되어야 한다.
15) 지역 교회는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은사들과 직무들을 드러나게 하고 그에 대한 공동체적 인식을 제공하는 형태와 기회들을 마련하도록 요청받는다. 이는 사목적 임무를 위임하는 전례 거행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9.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여성
수렴
1) 우리는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그렇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 처음부터 창조는 인간의 공유된 하나의 본성, 하나의 소명과 하나의 운명, 그리고 두 가지의 구분되는 경험을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함으로써 일치와 다양성의 특징을 나타낸다. 성경은 여성과 남성의 상보성과 호혜성을 증언한다.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는 남성과 여성의 계약은 창조를 위한 하느님 계획의 핵심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을 자신의 대화 상대자로 여긴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여성들과 말씀하시고,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그들을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 부르신다. 이 여성들은 그분 치유의 힘과 해방, 인정을 경험했고, 그분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걸어갔다(루카 8,1-3 참조). 부활 아침에 그분께서는 한 여성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당신 부활을 전하는 임무를 맡기셨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여성과 남성은 세례성사로 동등한 품위를 받으며 성령의 다양한 선물을 동일하게 받는다(갈라 3,28 참조). 남성과 여성은 경쟁이 아닌 공동 책임성을 특징으로 하는 친교로 부름받았으며, 그것은 교회의 삶의 모든 차원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듯이, 우리는 함께 “행복 선언의 힘으로 소집되고 부름받은 백성”이다.
3) 총회 동안에 우리는 여성과 남성 간 호혜성의 아름다움을 체험하였다. 우리는 앞선 시노드 여정 단계에서 나온 호소를 다시 표명하며, 교회가 사목적 그리고 성사적 관점에서 더욱 여성을 이해하고 동반하도록 교회에 요청한다. 여성들은 젊은 시절부터, 그리고 어머니로서, 우정의 관계에서, 어떤 나이이든 가정생활에서, 직장에서. 축성 생활에서 등 삶의 여러 단계에서 거룩함을 향한 여정 동안 얻은 영적 경험을 나누기를 원한다. 아직도 성폭력과 경제적 불평등, 여성을 대상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깊게 새겨진 사회 안에서 그들은 정의를 외친다. 그들에게는 인신매매, 강제 이주와 전쟁에서 비롯된 상처가 있다. 여성에 대한 동반과 그들의 결정적 발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4) 여성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을 구성하며, 종종 가정 안에서 첫 번째로 신앙을 전하는 선교사이다. 여성 축성 생활자들은 관상 생활과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근본적으로 중요한 선물, 표징, 증언이 된다. 여성 선교사들, 성인들, 신학자들, 신비가들에 대한 오랜 역사는 우리 시대의 여성과 남성들에게 영감과 자양분의 강력한 원천이다.
5) 신앙의 여성이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나자렛의 마리아께서는 모든 이에게 신학적이고 교회적이며 영성적 의미의 특별한 원천이시다. 마리아께서는 주의 깊게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성령께 열려 있으라는 보편적 부르심을 상기시켜 주신다. 그분은 낳고 키우는 기쁨을 아셨고, 아픔과 고통을 겪으셨다. 그분께서는 어려운 상황에서 출산하셨고, 피난하는 경험을 하셨으며, 당신 아드님께서 잔인하게 살해되시는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또한 부활의 광채와 성령강림의 영광을 아셨다.
6) 많은 여성이 사제들과 주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현하였지만, 상처를 주는 교회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성직주의,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권위의 부적절한 사용은 계속해서 교회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 친교를 손상시킨다. 어떤 구조적 변화를 위해서든 그 기초로 깊은 영적 회심이 필요하다. 성적인 남용, 권력과 경제적 남용은 계속해서 정의와 치유, 화해를 요청한다.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모든 이를 보호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을지 질문한다.
7)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서 존엄성과 정의가 손상될 때,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선포하는 신뢰성이 약화된다. 시노드 과정은 관계들의 쇄신과 구조적 변화들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남녀 평신도, 남녀 축성 생활자들, 부제들, 사제들과 주교들 등 사명에서 공동 책임이 있는 제자들 모두의 참여와 기여를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8) 시노드 총회는 여성에 대하여 하나의 논의 혹은 문제로서 말하는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요청한다. 대신 우리는 하느님 계획의 심오함을 더욱 잘 이해하고자 남성과 여성이 대화하는 그런 교회를 발전시키기 원하며, 그 계획 안에서 모두가 종속과 배제, 경쟁이 없는 주역들이다.
다루어야 할 질문
9) 온 세상의 교회들은 여성들의 공헌과 교회의 삶과 사명의 모든 분야에서 그들에게 맡겨진 사목적 책임의 증가를 더 많이 인정하고 소중히 여길 것을 분명하게 요청하였다. 모든 이의 은사를 더 잘 표현하고 사목적 필요에 더 잘 응답하려면 교회는 어떻게 기존의 역할과 직무에 더 많은 여성을 참여시킬 것인가? 새로운 직무가 필요하다면 누가 어떤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식별할 것인가?
10) 여성 부제직에 대하여 다양한 입장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성전(聖傳)과의 연속성이 없기에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 어떤 이들은 여성에게 부제직을 허용하는 것은 초대 교회의 실천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시대의 징표에 대한 필요하고 적합하며, 성전에 충실하고, 교회 안에서 생기와 에너지를 쇄신하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속 울림을 발견할 수 있는 응답이라고 본다. 또는 이 요청이 교회가 시대 정신을 따르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위험한 인간학적 혼란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11) 이에 관한 논쟁은 부제직 신학에 대한 더욱 폭넓은 성찰과 연관되어 있다(아래 11장, 7-8 참조).
제안
12) 지역 교회는 특히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서 더욱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경청, 동반, 돌봄에의 봉사를 확대하도록 촉구된다.
13) 여성들이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고 사목과 직무에 책임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시급하다. 교황께서는 교황청 내 책임자의 자리에 여성의 수를 대폭 늘렸다. 이는 교회의 삶의 다른 차원에서도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교회법적 규정을 적합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14) 교황께서 설립하신 위원회들의 연구와 이미 이루어진 신학적, 역사적, 그리고 주석학적 연구 결과들을 활용하면서 여성 부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목적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 결과들은 시노드 총회 다음 회기에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15) 교회 내 노동 차별과 불공평한 임금 문제를, 특히 너무 자주 값싼 노동력으로 대우받는 여성 축성 생활자들의 경우를 다루고 또 해결해야 한다.
16) 양성 프로그램과 신학 연구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성품 직무 양성을 증진하기 위하여 신학교 양성과 교과 과정에 여성을 포함시켜야 한다.
17) 전례문과 교회 문헌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또한 여성의 경험으로부터 더 활발하게 길어 올린 단어, 표상, 그리고 이야기들을 많이 포함하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8) 여성들이 교회법적 모든 절차에서 재판관이 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양성받을 것을 제안한다.
10. 축성 생활과 평신도 단체: 은사적 표징
수렴
1) 수 세기 동안 교회는, 성령께서 교회를 젊어지게 하고 새롭게 하고자 주시는 가장 특이한 것부터 가장 단순하고 널리 퍼진 은사까지 늘 체험하여 왔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이 은사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몸소 교회의 사명을 지지하고 이끄시며 비추시는 섭리적 도움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인정한다.
2) 교회의 은사적 차원은 축성 생활 안에서 풍요로움과 그 다양한 형태로 특별하게 드러난다. 그 증언은 모든 시대에 교회 공동체의 삶을 쇄신하는 데에 기여하여 왔으며, 세속화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에 대한 해독제였다. 다양한 수도 가족들은 기도의 산에서, 세상의 길에서, 공동체적 삶의 형태에서, 사막의 고독 속에서, 그리고 문화적 도전들과 마주하여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 준다. 축성 생활은 종종 역사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성령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그들의 예언을 필요로 한다. 더욱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축성 생활 공동체가 수 세기 동안 숙련한 시노달리타스 삶의 실천과 공동 식별을 주의 깊게 그리고 감사하며 바라본다. 또한 우리는 축성 생활 공동체들에서 함께 걷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많은 수도회가 구조를 개선하고 삶의 양식을 재고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다가가는 새로운 형태를 찾기 위하여, 관구 참사회나 총원 참사회에서 성령 안에서의 대화 또는 유사한 식별 형태를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형제적 대화의 장을 만들지 못하는 권위적 방식이 지속되고 있음도 발견한다.
3) 하느님의 백성은 오랜 역사를 가진 공동체에서 그리고 교회적 단체의 새로운 경험이 피어나는 곳에 있는 쇄신의 씨앗을 마찬가지로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한다. 평신도 단체, 교회 운동들,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는 세례 받은 모든 이의 공동 책임성의 성숙을 드러내는 귀중한 표징이다. 그들의 가치는 다양한 성소들 간의 친교의 증진, 복음 선포의 열정, 경제적 사회적 변두리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감, 그리고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노력에 있다. 이들은 종종 시노드적 친교와 사명 참여의 모델이다.
4) 축성 생활자와 평신도 단체 구성원들, 특히 여성에게 행하여지는 다양한 형태의 남용은 권위 행사에 있는 문제를 보여 주며, 이에 대한 단호하고 적절한 개입을 요청한다.
다루어야 할 질문
5) 교회의 교도권은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 교계적 선물과 은사적 선물의 중요성에 대한 폭넓은 가르침을 발전시켜 왔으며, 이 가르침을 교회적 인식과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더 잘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교회론적 의미와 구체적인 사목적 함의에 대하여 질문할 필요가 있다.
6) 교회 안에서 다양한 은사적 표현들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다가가는 예언자적 삶을 살고, 영적 실재에 대한 더욱 깊은 체험으로 문화를 비추어야 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의 임무를 강조한다. 축성 생활, 평신도 단체, 교회적 운동과 새로운 공동체들이 예언적 현존으로 거룩함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기여하면서, 자신들의 은사를 지역 교회 안에서 친교와 사명에 봉사하는 데에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제안
7) 우리는 1978년 문서 「상호 관계」(Mutuae Relationes)에서 제안한 “교회 안에서 주교와 수도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 기준들”을 수정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이 무르익었다고 생각한다. 관련된 모든 이를 포함하면서 이 개정이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을 제안한다.
8) 같은 목적으로 주교회의들, 남녀 축성 생활회와 사도 생활단 장상연합회는 만남과 시노드 정신에 따른 여러 형태의 협력을 증진시킬 장과 적절한 도구들을 활성화할 것이다.
9) 개별 지역 교회 차원에서든 교회들의 연합체 차원에서든, 선교적인 시노달리타스의 증진은 평신도 단체, 교회적 운동,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와 지역 교회의 삶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증진하기 위하여 이들 각각의 대표자들이 관여하는 자문 기구와 협의 기구의 제정과 그 구체적인 구성을 요청한다.
10) 모든 차원에서의 신학적 양성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수품 직무자의 양성 과정에서 교회의 은사적 차원에 기울였던 관심을 점검하고 필요한 경우 강화해야 한다.
11.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서 부제와 사제
수렴
1) 사제들은 주교의 일차적 협력자들이고 주교와 더불어 한 사제단을 구성한다(교회 헌장 28항 참조). 부제들은 직무를 위하여 서품되었고 말씀과 전례, 특히 사랑 안에서 하느님 백성을 섬긴다(교회 헌장 29항 참조) 그들에 대하여 시노드 총회는 무엇보다도 깊은 감사를 표한다. 그들이 외로움과 고립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기도와 우정, 협력으로 지원할 것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권고한다.
2) 부제와 사제는 본당에서의 봉사, 복음화, 가난한 이들과 이민자들에게 다가감, 문화와 교육 분야에서의 활동, 만민 선교, 신학적 탐구, 영성 센터와 그 밖의 많은 곳에서 활기를 북돋는 일 등 매우 다양한 형태의 사목 직무를 수행한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서 수품 직무자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환대하고 모든 이에게 귀를 기울이는 태도로 하느님 백성에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그리고 깊은 개인적 영성과 기도의 삶을 키우도록 부름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필리 2,6-7) 예수님을 본받아 권위 행사에 대하여 재고하도록 부름받았다. 시노드 총회는 많은 사제와 부제가 자신의 헌신으로 착한 목자요 종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을 인정한다.
3) 직무와 사명에 걸림돌들 가운데 하나는 성직주의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서, 그 부르심을 봉사보다는 특권으로 여기게 만들며,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세속적 권력 방식으로 나타난다. 사제직에 대한 이 왜곡은 하느님 백성의 일상과의 생생한 만남, 그리고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봉사의 경험에 힘입어 양성 초기 단계에서부터 대처하여야 한다. 오늘날 사제의 직무는 주교와의 관계, 사제단 안에서 그리고 다른 직무들과 은사들과 이루는 깊은 친교 안에서가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다. 불행히도 성직주의는 교역자들에게서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태도이다.
4) 공동 책임성의 방식으로 수품 직무를 수행하려면 자신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성적 양성이 문화적, 영성적, 사도적 성장과 통합된 현실적 자기 인식 과정이 이루어지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젊은이의 성소가 길러진 출신 가정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여, 그리고 그의 성장을 동반한 다른 가정들의 기여를 과소평가하여서는 안 된다.
다루어야 할 질문
5)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세례 받은 모든 이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전망에서, 부제와 사제의 양성에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신학교 또는 그 밖의 직무 후보자 양성 과정들이 공동체의 일상생활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널리 표명되었다. 권위적 태도를 초래하고 성소의 참된 성장을 방해하는 형식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 양성 방식과 과정에 대한 재고를 위해서는 광범위한 수정과 논의가 필요하다.
6) 사제 독신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모든 이가 그 예언적 가치와 그리스도를 닮아감에 대한 증거를 높이 평가하였다. 어떤 이들은 특히 교회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이 사제 독신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곳에서, 사제 독신제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적합성이 라틴 교회에서 반드시 규율적 의무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질문한다. 이는 새로운 주제는 아니며, 앞으로 더 논의되어야 한다.
제안
7) 라틴 교회에서 종신 부제는 다양한 교회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행되어 왔다. 어떤 지역 교회는 전혀 도입하지 않았고, 어떤 교회에서는 사제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 부제가 이해될까 두려워한다. 때로 부제들의 직무성은 공동체 안의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전례에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부제 직무의 실행에 대하여 평가할 것을 권고한다.
8)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부제직을 단지 사제직을 받기 위한 하나의 단계로서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요청이 대두되었다. 주요한 형태의 부제직을 규정하는 ‘종신’이라는 언어 사용은, 이를 ‘과도기적’ 형태와 구분하기 위한 관점의 변화가 아직 적절하게 실현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지표이다.
9) 부제직에 대한 신학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또한 라틴 교회 안에서 그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야 교계 제도의 고유한 그리고 영속적 단계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은 여성의 부제직 허용 문제도 비추어 줄 것이다.
10)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선교적 교회라는 전망에 비추어 수품 직무자 양성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가 요청된다. 이는 양성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제 양성 지침」(Ratio Fundamentalis)의 개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또한 사제와 부제의 지속 양성도 시노달리타스 방식에 따르도록 권고한다.
11) 투명성의 차원과 책임의 문화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건설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책임 역할을 수행하는 사제와 부제의 직무 수행 방식을 정기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절차들과 구조들을 식별할 것을 지역 교회에 요청한다. 참여 조직이나 사목 방문 같은 기존의 제도들은 공동체의 참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이 작업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든 그런 형태들은 방해나 관료적 부담이 되지 않도록 지역 교회의 상황과 다양한 문화에 적합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지역적 또는 대륙적 차원이 그러한 절차들과 구조들의 형태 식별에 더 적합한 장일 수 있다.
12) 각 경우와 상황에 따라, 직무를 떠난 사제들을 그들의 양성과 경험을 활용하는 사목적 봉사에 투입할 가능성을 고려하여야 한다.
12. 교회적 친교 안에서 주교
수렴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망에서 볼 때,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지역 교회 안에서, 그리고 지역 교회와 교회 전체 간에 실현되는 친교에 봉사하도록 세워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주교의 모습은 그에게 맡겨진 하느님 백성, 사제들과 부제들, 축성 생활자들, 다른 주교들과 로마 주교와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항상 사명을 지향하는 전망 안에서 적합하게 이해될 수 있다.
2) 지역 교회에서 주교는 복음 선포와 전례에 대한 일차적 책임자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가장 낮은 이들을 옹호하도록 장려한다. 일치의 가시적 근원인 주교는, 특히 복음을 선포하고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께서 일으키신 다양한 은사와 직무를 식별하고 조화롭게 하는 직무를 받았다. 그 직무는 통치가 공동 책임성,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에 대한 경청에서 나오는 설교, 그리고 겸손과 회심으로부터 오는 성화와 전례 거행에서 실현될 때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실현된다.
3) 주교는 지역 교회 안에서 ‘모든 이, 몇몇 사람, 그리고 한 사람’ 간의 순환성을 촉진함으로써 시노드 과정을 시작하고 촉진하는 데에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한다. 주교 직무(한 사람)는 식별과 결정 과정에 더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몇몇 사람”(참여와 통치 조직)의 기여를 통한 “모든” 신자의 참여를 중요하게 여긴다. 주교가 시노달리타스 관점을 가지게 된 확신 그리고 권위를 행사하는 방식은 결정적으로 사제와 부제, 남녀 평신도와 남녀 축성 생활자들의 참여에 영향을 미친다. 주교는 모든 이에게 시노달리타스의 모범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4) 교회가 하느님의 가족으로 이해되는 상황에서 주교는 모든 이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반면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그의 권위가 위기에 놓였음을 경험한다. 주교의 모습이 행정 권위와 동일시되지 않으려면 주교직의 성사적 본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5) 주교에 대한 기대는 종종 매우 높고, 많은 주교들은 행정적, 법적 업무의 과중함을 토로하고 있으며, 그러한 과중함은 그의 사명을 충만하게 수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주교 또한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데, 주교가 인간적 지원과 영적 지지를 항상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외로움의 괴로운 체험이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주교의 사명이 가지는 본질적 측면에 다시 초점을 맞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주교들 그리고 사제단과의 참된 형제애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다루어야 할 질문
6) 신학적 차원에서 주교와 지역 교회 사이의 상호 관계의 의미를 더 심화해야 한다. 주교는 지역 교회를 이끌도록, 동시에 지역 교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은사들의 풍요로움을 인정하고 보호하도록 부름받았다.
7) 주교의 책임성을 공유하는 원리의 기초인 신학적 교회법적 준거들을 정확히 하고, 공동 책임성의 상황과 형태 그리고 함의를 결정하기 위하여, 교회 헌장의 가르침과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Praedicate Evangelium)와 같은 최근 교도권 가르침에 비추어 성품 성사와 재치권 사이의 관계 문제를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8) 어떤 주교들은 주교들 안에 충만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신앙과 윤리 문제에 개입하기를 요청받았을 때 불쾌감을 표현한다. 주교의 단체성과 신학적 사목적 관점의 다양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9) 미성년자와 취약한 이들의 돌봄을 위하여 정한 절차의 투명성과 그것에 대한 존중의 문화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 포함된다. 남용 방지를 위한 구조를 더욱 많이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남용을 다루는 예민한 문제는 많은 주교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재판관으로서의 역할을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을 준다. 법적 업무를 교회법적으로 명시된 다른 기관에 맡기는 것이 적절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제안
10) 주교의 권위 행사 방식, 교구 재산 관리, 그리고 참여 조직의 작동, 그리고 온갖 형태의 남용에서의 보호와 관련하여, 주교의 활동을 정기적으로 검증할 구조와 과정들을 교회법적으로 정의된 형태로 활성화해야 한다. 님용에 맞서는 보호는 물론 공동 책임성을 증진하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 책임의 문화가 필수 요소이다.
11) 주교 평의회(교회법 제473조 제4항) 그리고 교구 사목 평의회 또는 동방 교회의 교구(eparchia) 사목 평의회(교회법 제511조, 동방 교회법 제272조)를 의무화하고 법적 차원에서도 공동 책임성 관련 교구 구조들을 더욱 활성화하여야 한다.
12) 시노드 총회는 교황 대사의 권위를 주교회의의 참여와 균형을 맞추면서 주교 후보자 선정 기준을 검토하도록 요청한다. 또한 더 많은 남녀 평신도, 남녀 축성 생활자의 의견을 경청하고 부적합한 압력이 없도록 하면서 하느님 백성의 자문을 확대하도록 요청한다.
13) 많은 주교들이 교회 관구 구조와 교회 연합구 구조의 기능을 재고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는데, 주교들이 형제애, 상호 지원, 투명성과 더 폭넓은 자문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영토와 상황에서 그 구조가 단체성의 구체적 표현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3. 주교단 안에서 로마의 주교
수렴
1) 시노달리타스의 역동성은 로마 주교의 직무에도 새로운 빛을 비춘다. 시노달리타스는 사실 지역, 광역, 그리고 보편 교회 차원에서 교회의 공동체적 차원(모든 이), 단체적 차원(몇몇 사람) 그리고 개인(한 사람)의 차원을 조화롭게 표현한다. 그런 전망에서 로마 주교의 베드로 직무는 전체 하느님 백성을 포함하는 공동체적 측면과 주교직의 단체적 차원과 함께 시노달리타스 역동성 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노달리타스, 단체성 그리고 수위권은 서로를 요청한다. 곧 수위권은 시노달리타스와 단체성 수행을 전제하고, 이 둘은 수위권 행사를 함축한다
2)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촉진하는 것은 로마 주교의 직무에서 본질적 측면이다. 교회 일치적 여정은 베드로의 후계자 직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게 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여야 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에서 하신 초대에 대한 응답들 그리고 교회 일치적 대화의 결과들은 수위권, 단체성, 시노달리타스 그리고 이들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3) 교황청의 개혁은 가톨릭 교회의 시노드 여정에서 중요하다.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교황청은 교황과 주교들 사이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황과 주교들 각자의 본성에 고유한 방식에 따라 그 양편에 봉사합니다.”(I. 8항)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친교의 삶”(「복음을 선포하여라」, I. 4항) 그리고 “건실한 분권화”(「복음의 기쁨」 16항; 참조: 「복음을 선포하여라」 II. 2항)에 기초한 개혁을 촉진한다. 교황청의 많은 구성원이 교구 주교들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보편성을 표현하며, 교황청과 지역 교회 사이의 관계를 촉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양한 부서들 사이에서나 그들 각각 안에서나 「복음을 선포하여라」의 효과적인 실현은 교황청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를 더 많이 실현하도록 촉진할 수 있다.
다루어야 할 질문
4)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 주교직에 대한 쇄신된 이해가 로마 주교의 직무와 교황청의 역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깊은 연구가 요청되었다. 그러한 질문은 교회의 통치에 있어 공동 책임성을 실현하는 방법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회 법전』과 『동방 교회 법전』은 교황 직무의 더욱 합의체적인 행사를 위한 규정들을 보편적 차원에서 제공한다. 이 규정들은 실천적인 면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고, 앞으로 두 교회법의 본문을 개정할 때 강화될 수 있다.
5) 시노달리타스는 베드로 직무에 대한 추기경단의 협력 방식을, 그리고 정례 비정례 추기경 회의에서 단체적 식별을 증진시키는 형식들을 밝혀 줄 수 있다.
6) 추기경단 구성원들의 다양한 출신지와 문화를 고려하면서 그들 사이의 상호 인식과 친교의 유대를 촉진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교회의 선을 위하여 중요하다.
제안
7) 사도좌 정기 방문은 지역 교회의 목자들이 로마 주교와 교황청 내 그의 가장 긴밀한 협력자들과 이루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그것이 언제나 더욱 친교, 그리고 단체성과 시노달리타스의 참된 실현을 촉진하는 개방적인 상호 교류의 기회가 되도록 그 실현 형태를 재고할 것이다.
8) 교회의 시노달리타스 모습에 비추어, 교황청의 각 부 지역 교회 상황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더 경청하기 위하여 주교들의 자문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9) 교황 사절들의 봉사를 촉진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나라의 지역 교회들이 이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형식을 마련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10) 베드로 직무에 봉사하는 시노드적 평의회로서 추기경 평의회(C-9)의 경험의 가치를 강조하고 강화할 것이 제안되었다.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교황청 고위 성직자를 주교로 서품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제3부 – 유대를 만들고 공동체를 구성하기
14. 양성에 대한 시노달리타스 방식의 접근
수렴
1) 자신의 양성을 돌본다는 것은, 세례받은 모든 이 각자가 자신이 받은 탈렌트로 열매를 맺고 모든 이를 위한 봉사에 그 탈렌트를 사용하기 위하여 주님의 선물에 대하여 마땅히 드려야 하는 응답이다.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에 기울이신 시간은, 종종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사명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교회적 행위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이에게 감사와 격려의 말을 표현하고 싶고, 교회의 시노드 여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요소들을 취합하도록 이들을 초대한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양성하신 방법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모범이다. 그분은 몇 가지 가르침을 주는 데에 국한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삶을 공유하셨다. 그분의 기도로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청원을 이끌어내셨고, 군중을 배 불리시면서 가난한 이들을 돌려보내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보여 주셨다. 우리는 복음에서, 양성이 자신의 능력 강화인 것만도 또 우선인 것도 아니라고 배운다. 그것은 패배와 실패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논리로 회심하는 것이다.
3)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양성의 대상인 것만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양성에 공동 책임이 있는 주체이다. 사실 첫 번째 양성은 가정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신앙의 선포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은 흔히 바로 가정에서, 우리 부모와 조부모의 말, 아니 사투리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이는,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교육적 협력에서 단순한 이들의 지혜와 자신의 기여를 결합시켜야 한다. 시노달리타스 의미로 이해된 양성의 첫 번째 표징은 바로 이것이다.
4) 그리스도교 입문에서 우리는 양성 과정을 위하여 직접적인 위대한 지침을 발견한다. 양성의 중심에 케리그마의 심화가, 곧 우리에게 새 생명의 선물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다. 예비신자 교리 교육 활동의 논리는 우리가 모두 거룩함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화해의 성사가 그 완성으로 이끄는 회심의 여정을 가고, 수많은 증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키운다.
5) 하느님 백성의 양성은 많은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신학적 양성 외에 공동 책임성, 경청, 식별,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 등의 훈련,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 공동의 집의 돌봄, ‘디지털 선교사’로서의 일, 성령 안에서 식별과 대화 과정의 촉진, 동의를 이끌어 내고 갈등을 해소하는 일 등 일련의 특별한 역량들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어린이와 젊은이의 교리 교육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여기에는 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6)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한 참여는 시노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곧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함께 걸어가면서 함께 양성되어야 한다. 여러 사목적 상황에서 볼 수 있는 ‘대리’ 사고방식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시노달리타스를 핵심 개념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양성의 목표는 하느님 백성이 세례성사로 받은 자신의 소명을 가정, 직장, 교회적, 사회적 지성적 분야에서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따라 교회의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다루어야 할 질문
7) 젊은이들의 성장 과정을 동반하고 독신과 축성된 정결로 부름받은 이들의 정서적 성숙을 지원하기 위하여, 정서 교육과 성교육 주제를 심화할 것을 권고한다. 이 분야에서의 양성은 인생의 모든 시기에 필요한 도움이 된다.
8) 인간 경험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문학들, 특히 심리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를 심화할 필요가 있는데, 인문학의 공헌을 단지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숙한 종합으로 통합하여야 한다.
9) 앞서 열렸던 여러 시노드에서 요청하였던 것처럼, 수품 직무자의 양성에 하느님 백성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여야 한다. 양성 프로그램에 대한 광범위한 개정이 필요한데, 여성과 가정들의 기여를 촉진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0) 우리는 주교회의가 디지털 옵션의 발전을 포함, 이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활용하여 지속적 양성을 위한 문화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하여 지역 차원에서 노력하도록 독려한다.
제안
11) 우리는 시노달리타스에 비추어, 하느님 백성 모두(평신도, 축성 생활자, 수품 직무자)의 공동 양성 프로그램 제안을 가능한 한 우선순위로 둘 것을 권한다. 교구는 지역 교회 차원에서 이 계획을 독려하여야 한다. 우리는 주교회의가 디지털 옵션의 발전을 포함, 이용 가능한 모든 자원들을 활용해 지속적 양성 문화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하여 광역 차원에서 노력하도록 독려한다.
12) 앞서 열렸던 여러 시노드에서 제안한 바와 같이 하느님 백성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수품 직무자의 양성 과정에 관여할 것이다. 특히 여성의 참여가 중요하다.
13) 수품 직무 후보자 선정의 적절한 과정이 필요하며, 신학생들을 위한 예비 과정을 위한 필수요건이 지켜져야 한다.
14) 수품 직무자의 양성은 다양한 상황에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수품 직무 후보자들에게, 특별한 여정을 시작하기 이전에 비록 초기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참된 경험을 가지도록 요청한다. 양성 과정은 신자들의 공통된 생활과 유리된 인위적 환경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직무자 양성의 요건을 준수하면서, 설교, 성사 거행, 애덕의 실천 등에서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참된 정신을 기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제와 종신 부제를 위하여 「사제 양성 지침」의 개정이 필요할 수 있다.
15) 시노드 총회의 다음 회기를 준비하면서, 시노드 과정의 수용을 평가하고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 적합한 방식의 권위 행사에 필요한 변화를 제안하기 위하여 사제의 초기 양성과 지속 양성 책임자들에게 자문할 것을 제안한다.
15. 교회적 식별과 열린 문제들
수렴
1) 성령 안에서의 대화 경험은 참여한 모든 이에게 풍요로운 것이었다. 특히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고 서로 경청하는 데에서 자유를 우선시하는 소통의 방식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논리를 고려할 시간과 공간을 허용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장을 반복하는 것에 기초한 토론으로 지나치게 성급하게 가버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2) 이러한 태도는 디지털 기술과 인공 지능의 인간학적 효과, 비폭력과 합법적 방어, 직무에 관련된 문제들, 육체성과 성(性)에 관련된 주제 등 교회 안에서도 논쟁이 되는 문제들을 심화하는데 호의적인 환경을 만들었다.
3) 이런저런 상황에서 참된 교회적 식별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하느님 말씀과 교도권에 비추어 더욱 폭넓은 정보 기반과 더 명확한 성찰 요소들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 형식들에 안주하여 버리지 않으려면, 철학적 성찰과 신학적 작업을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관점과 대조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4) 계속해서 성찰하여야 할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사랑과 진리의 관계에 대한 것, 그리고 논란이 되는 많은 문제에 이 관계가 미치는 영향이 있다. 이 관계는 도전이기에 앞서 실은 그리스도론적 계시에 있는 하나의 은총이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시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완성하셨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 85[84],11-12).
5)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그 고유한 역사와 상황에서 만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분께서는 결코 편견이나 낙인에서 출발하지 않으시고, 오해받고 거부당하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께서 온 마음으로 맺으시는 참된 관계 속에서 만나신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목소리에, 비록 그 소리가 말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늘 귀 기울이신다. 그분께서는 사랑을 전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행동을 하시고, 당신 현존으로 새 삶을 가능케 하시며, 그분을 만나는 이는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진리가 하나의 관념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현존 자체이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행동하시되, 그 사랑이 단지 감정인 것이 아니라 역사를 변화시키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6) 이 분명한 복음적 전망을 사목적 선택으로 삼을 때 만나게 되는 어려움은, 우리가 복음에 부응해서 살 수 없다는 표시이며, 우리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 회심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를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경직된 태도로 그리고 판단하는 자세로 교리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배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적은 돈으로 자비를 행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지 못한다. 진리와 사랑의 일치는 진짜 형제자매들처럼, 다른 이의 어려움을 자기 것으로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까닭에 그 일치는 오직 동반의 길을 인내로이 따를 때만 실현될 수 있다.
7)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 삶의 끝, 혼인 생활의 어려운 상황, 인공 지능과 관련된 윤리 문제같이 어떤 문제들은 사회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때로 우리가 작업하는 인간학적 범주는 경험이나 학문적 인식에서 나오는 복잡한 요소들을 받아들이는데 충분하지 않아서 정교하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사람들과 교회의 몸에 상처를 주는 단순한 판단에 굴복하지 말고, 이 성찰을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더 갖고 힘을 더 쏟는 것이 중요하다. 교도권은 이미 많은 지침을 주었고, 적절한 사목적 활동으로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더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에서도, 기도와 마음의 회심 안에서 닮는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가 따를 길을 보여 준다.
다루어야 할 질문
8) 우리는 교회적 실천이 주는 영감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과 진리의 원천적 결합에 대한 교회적 성찰을 계속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9) 다양한 지식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적 능력이 참된 교회적 봉사가 될 수 있도록 영적 지혜를 성숙시키도록 격려한다. 이 분야에서 시노달리타스는, 접근 방식들은 다양하지만 목적들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사명에 봉사함을 함께 생각하려는 의지로 표현된다.
10)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일상의 경험에서 출발하고 그에 봉사할 줄 아는 신학적 그리고 문화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밝힐 필요가 있다.
제안
11) 논란이 되는 교리적, 사목적, 윤리적 문제들에 대하여 하느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 신학적 성찰에 비추어, 그리고 시노드 경험에 비추어, 함께 식별할 수 있는 계획을 발전시키도록 제안한다. 이는 토론의 비밀을 보호하고 솔직한 논의를 장려하는 제도적 환경에서, 적절한 경우에는 언급된 논쟁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포함시키면서, 다양한 능력과 배경을 가진 전문가들 사이에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시노드 총회 차기 회기를 고려하여 시작되어야 한다.
16. 경청하고 동반하는 교회를 위하여
수렴
1) 경청은 최근 2년 동안의 시노드 여정과 총회의 작업을 특징짓는 가장 강렬한 경험을 잘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것은 주고받는 경청, 곧 경청하고 경청받는 이중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경청은 매우 인간적인 가치, 역동적 호혜성이며 여기에서 다른 이의 여정에 기여하고 또 자신을 위한 누군가의 기여를 받아들인다.
2)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로부터 말을 하도록 그리고 경청받도록 초대된다는 것은 지역 교회 차원에서 시노드 여정에 참여하였던 많은 이에게, 특히 사회 안에서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여러 형태의 소외를 겪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렬하고도 예기하지 않았던 경험이었다. 경청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긍정과 인정을 받는 경험이고 이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원을 활성화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3) 우리의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서는 어떤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이런 전망에서, 경청한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한 공간을 주기 위하여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요청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의 대화라는 역동성 안에서 이를 경험했다. 이것은 금욕적 수행을 요청하는 것으로서, 각자에게 자신의 한계와 자기 관점의 편파성을 인정하게 한다. 그리하여 교회 소속의 경계선 너머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며, 변화와 회심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4) 경청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론적 가치를 지닌다. 곧 예수님께서 만나신 사람들에게 취하셨던 그 태도를 우리도 취하는 것을 의미하며(필리 2,6-11 참조), 이는 교회적 가치 또한 지니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어떤 세례 받은 이들의 활동을 통하여 경청하는 것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5) 시노드 여정 동안 교회는 경청되고 동반받기를 요청하는 많은 사람과 집단을 만났다. 먼저 젊은이들을 들 수 있는데, 경청과 동반에 대한 이들의 요청은 그들을 위하여 열렸던 세계주교시노드(2018년)에서 그리고 젊은이를 향한 우선적 선택의 필요성을 확인한 이번 시노드 총회에서 강하게 울려 퍼졌다.
6) 교회는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성직 구성원이나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성적, 영적, 경제적, 제도적 남용, 그리고 권력과 양심의 남용에 희생된 사람들이나 그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참된 경청은 치유, 참회, 정의, 화해를 향한 여정의 근본 요소이다.
7) 시노드 총회는 자신들이 삶의 원천으로 인식하는 전통과 교도권의 혼인과 성 윤리 문제에 대한 가르침에 충실함을 선택함으로써 고독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있음과 그들에 대한 지지를 표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들에게 특별히 가까이 있으며,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헌신에 동반하도록 초대되었다.
8) 혼인과 관련된 상황,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 때문에 교회로부터 소외되거나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경청되고 동반받으며 그들의 존엄성이 보호되도록 요청한다. 시노드 총회에서, 교회에서 상처받거나 무시되는 이들 또는 그렇게 느끼는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비, 공감이 있었는데, 이들은 ‘집으로’ 돌아와 안전함을 느끼고 판단받을까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경청되고 존중받는 장을 원한다. 경청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함께 걸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시노드 총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누구의 존엄성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재확인한다.
9) 불평등이 끝없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가난, 배제와 소외를 겪는 사람들 또한 경청과 동반을 찾아 교회를 향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면 교회가 그들의 관점을 존중하게 되고 구체적으로 그들 편에 서며, 무엇보다 그들에게 교회 자신이 복음화될 수 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특히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그리고 자신들이 공동체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다고 느낄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청과 동반에 봉사하는 이들에게 감사하고 격려를 전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그들은 “[너희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6)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현한다.
10) 많은 이들이 종종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외로운 상황에서 산다. 노인들과 병자들은 종종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도록 본당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권한다.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 찾아 주었고’(마태 25,39 참조)라는 복음 말씀에 영감받은 자비의 행위들은 관련된 사람들에게 그리고 공동체적 연대를 형성하는 데에 깊은 의미를 가진다.
11) 매우 쉽게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만들 줄 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목소리를 교회는 경청하고자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인 이유로 젊은이들, 여성들, 소수자들처럼 어떤 구성원들이 자유로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또한 억압적이고 독재적인 통치 체제에서 사는 경험은 자유롭게 말하는데 필요한 신뢰를 손상시킨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권위의 행사가 자유를 주기보다 억압적일 때에도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다루어야 할 질문
12) 경청은 무조건적 환대를 요청한다. 이것은 복음의 구원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기를 포기하거나 어떤 의견이나 입장이든 지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조건 없이 경청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셨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만나는 모든 이와 복음을 나누도록 초대되었다.
13)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기초 공동체 또는 소공동체들이 세례 받은 이들의 그리고 그들 사이에 경청의 실천을 촉진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도시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도 탐색하면서 그 잠재력을 발전시키도록 초대되었다.
제안
14)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욱 환대하는 교회를 경험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까? 경청과 동반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활동만이 아니라 교회적 활동 형태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영적 동반을 강화하면서, 통상적 사목 계획 수립과 다양한 차원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활동의 구조 안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여야 한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경청하는 교회이기를 포기할 수 없으며, 이 노력은 구체적인 행위로 실현되어야 한다.
15) 교회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귀한 일을 하고 있는 기존의 많은 제도들과 구조들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이민자와 난민 등에 대하여 카리타스, 그리고 축성 생활 또는 평신도 단체들과 관련된 많은 단체가 수행하고 있는 경청과 동반의 활동들이 있다. 몇몇 사람에게 맡겨진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그들의 일과 공동체 삶의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16) 다양한 형태로 경청과 동반에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의 유형에 따라 적합한 양성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공동체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느낄 필요가 있다. 공동체 편에서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봉사의 가치를 충만하게 인식하고 이 경청의 열매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봉사를 더욱 확실하게 하려면 세례에 기초한 경청과 동반의 직무를 다양한 상황에 적합하게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한 직무 수여 방식은 공동체의 더 큰 참여를 증진할 것이다.
17) 일부다처제의 주제, 그리고 일부다처 형태의 결합을 하고 살면서 신앙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들을 동반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주교회의(SECAM)에 신학적 그리고 사목적 식별을 촉진하도록 권장한다.
17. 디지털 환경에서의 선교
수렴
1) 디지털 문화는 우리가 현실을 파악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사이에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일어난 근본적 변화를 나타낸다. 디지털 환경은 학습 과정, 시간, 공간, 몸 그리고 인격적 관계에 대한 이해, 우리의 사고 방식 전체를 변화시킨다.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은 우리 모두의, 무엇보다도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의 현실과 경험을 적합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디지털 문화는 사명과 별개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우리 시대 문화 안에서 교회의 증언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3) 선교사들은 그들에 앞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이끌려 새로운 경계선을 향하여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출발하였다. 이제 우리가 휴대전화나 태블릿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의미와 사랑을 찾는 모든 장에서 오늘날의 문화를 접할 차례이다.
4) 디지털 문화를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문화를 복음화할 수 없다. 종종 그것에 대한 직접적이고 깊은 체험을 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신학생들, 젊은 사제들, 젊은 남녀 축성 생활자들은 디지털 환경 안에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만이 아니라, 사목자들을 포함한 공동체의 나머지 사람들이 그 역동성에 더 친숙해질 수 있게 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다.
5) 시노드 과정에서 디지털 시노드의 활동(‘교회가 당신을 경청합니다’ 프로젝트)은 선교라는 관점에서 디지털 환경의 잠재력, 그 일을 하는 이들의 창조성과 관대함, 그들의 양성과 동반, 그리고 또래 간 토론과 협력의 기회 제공의 중요성을 보여 주었다.
다루어야 할 질문
6) 인터넷 사용은 청소년의 삶과 가정생활에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인터넷은 비록 우리의 삶을 개선하는데 커다란 잠재력을 가졌지만, 또한 집단 따돌림, 허위 정보, 성적 착취와 중독 등을 통하여 피해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온라인 공간이 안전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생명을 보장하는 공간이 되도록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가정을 지원할 수 있을지 긴급히 생각하여야 한다.
7) 탁월한 교리 교육과 신앙 양성을 제공하는 귀중하고 유용한 교회 관련 온라인 활동들이 많다. 불행히도 신앙과 관련된 주제들을 피상적이고 양극화를 초래하는 방식, 심지어 증오를 심어 주는 방식으로 다루는 사이트들도 있다. 교회로서 그리고 개별적 디지털 선교사로서 우리는 온라인상에서 소통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장의 경험을 보증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하여야 한다.
8) 온라인 사도직 활동은 전통적으로 이해된 지역 경계를 넘는 범위와 반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그 활동들이 규제될 수 있는지 어떤 교회 권위가 그 감독을 담당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9) 또한 우리는 기존의 본당과 교구 구조의 쇄신을 위하여 디지털 선교의 새로운 경계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야 한다. 점점 더 디지털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보수 논리의 감옥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선교의 새로운 수행 형태에 힘을 쏟을 것인가?
10)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19의 전 세계적 유행은 특히 노인과 공동체의 취약한 이들이 겪는 고립과 고독 체험을 감소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창의적 온라인 사목을 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가톨릭 교육기관도 봉쇄 기간 동안 양성과 교리 교육을 계속 제공하고자 온라인 플랫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 그리고 디지털 환경 안에서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어떤 지속적 선익이 될 수 있는지 평가하는 것이 좋다.
11)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우리가 그들을 초대하는 교회의 물리적 공간을 버리고 온라인 공간을 선호한다. 이것은 그들을 참여시키고, 그들에게 양성과 교리 교육을 제공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목적으로 성찰하여야 할 주제이다.
제안
12) 교회가 이미 활동하고 있는 디지털 선교사들의 모임을 촉진하면서, 그들을 인정하고 양성하며 동반할 것을 제안한다.
13)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어떤 신앙도 고백하지 않지만, 인간의 존엄성, 정의, 그리고 공동의 집에 대한 돌봄을 증진하기 위한 공동의 대의를 위하여 일하는 인플루언서들의 협력 관계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18. 참여 조직들
수렴
1)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세례 받은 모든 이는 각자 자신의 소명에 따라 자신의 경험과 능력으로 교회의 사명에 공동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모든 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교회 전체의 개혁을 위한 과정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데에 기여하여, 교회가 ‘복음화의 감미롭고 위안이 되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여야 한다. 시노달리타스가 모습을 갖추게 되는 조직들의 구성과 운영에서, 시노달리타스는 사명을 그 목표로 한다. 공동 책임성은 사명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음을 증언하고, 관료주의적 퇴행과 권력의 세속적 논리로부터 참여 조직을 자유롭게 하며, 함께 모이는 것이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한다.
2) 최근 교도권의 가르침(특히 교회 헌장과 「복음의 기쁨」)에 비추어 사명에 대한 모든 이의 공동 책임성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지역 교회의 모든 제도와 친교 조직에서 모든 봉사를 구조화하는데 기초적 준거가 되어야 한다(1코린 12,4-31 참조). 세상 안에서의 선교에 대한 평신도의 책임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돌봄을 주교와 신부들에게만 맡기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3) 탁월한 권위는 하느님 말씀의 권위이며, 이것이 참여 조직들의 모든 만남, 모든 자문, 그리고 모든 결정 과정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모든 차원에서의 모임이 그 의미와 힘을 성체성사로부터 길어 올리고, 경청하며 기도 안에서 나눈 말씀의 빛에 비추어 이루어져야 한다.
4)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선교 공동체에서 식별하고 결정하는 다양한 평의회의 구성은 사도적 면모를 가진 남녀들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교회에 자주 나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삶의 가장 일상적인 현실에서 참된 복음적 증언을 하는가로 구분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과 그 변두리에 살면서 이미 선교를 수행하는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자신 안에 그리고 참여 조직들 안에 울려 퍼질 수 있게 할수록 더 선교적이다.
다루어야 할 질문
5) 다양한 평의회에서, 특히 실천하는 사람 자신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가 나눈 것들에 비추어 어떻게 참여를 증진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각 구성원이 식별과 결정의 과정에 참여할 때 발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과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일상의 형제적 ‘친밀함’을 살아가는 신생 교회의 많은 소규모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우리는 배우고 격려받는다.
6) 참여 조직을 구성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에서 맡기신 임무를 미룰 수 없다. 복잡한 정서적 그리고 혼인 생활을 살아가는 남녀의 참여는 “다양한 교회 봉사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례, 사목, 교육, 제도 안에서 현재 이루어지는 배척의 다양한 형태들 가운데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여야 합니다”(299항). 이러한 식별에는 또한 적지 않은 지역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본당과 교구 공동체의 참여 조직에서의 배제 문제도 포함한다,
7) 교회적 친교의 복음적 독창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우리는 시노달리타스의 자문적 측면과 심의적 측면을 결합할 수 있을까? 하느님 백성의 은사적, 직무적 모습에 기초해서 다양한 참여 조직에서 어떻게 조언하고 식별하고 결정하는 임무를 통합할까?
제안
8) 복음화 사명의 능동적 주체로서의 하느님 백성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지역 교회에서 사목 평의회를 의무화하도록 법적으로 규정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적합한 남녀 평신도가 참여하게 하고, 참으로 사도적인 결정을 고려하여 식별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참여 조직이 강화될 것이다.
9) 참여 조직은 책무를 수행하는 이가 책임의 역동성을 경험하는 첫 번째 장이다. 그들의 노력을 격려하면서,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문화를 실현하도록 초대한다.
19. 교회 전체의 친교 안에서 교회들의 연합체
수렴
1) 성령께서 당신의 선물을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풍부하게 나누어 주시기에, 우리는 교회들의 친교 안에서 각 교회가 제공할 것들이 많다고 확신한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면, 다양한 지체들이 상호 의존적이며 같은 생명을 공유한다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26).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관점에서 생겨나는 겸손과 관대함, 존중과 나눔 등 영적 태도를 발전시키기를 원한다. 상호 인식을 증진하려는 의지, 그리고 영적 풍요로움, 선교 제자들 그리고 물질적 재화의 교환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필요한 구조들을 준비하려는 의지도 중요하다.
2)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라는 주제는 교회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충만하게 실현하는 데에 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가 시노달리타스와 단체성의 모습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시노드 총회는 시노드 과정의 첫 번째 단계가 올바로 진행된 데에는 주교회의들과 대륙별 회의들의 교회적 식별이 중요하였음에 동의하였다.
3) 시노드 과정은 『교회 법전』과 『동방 교회 법전』에서 규정한 조직들이 지역 교회들의 이해를 받을 때 어떻게 그 기능을 더 효과적으로 펼치는지 보여 주었다. 교회(교회 전체)가 교회들의 친교라는 사실은, 각 주교가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를 한 교회의 목자로서의 그의 직무를 구성하는 측면으로 이해하고 실행할 것을 요청한다.
4) 시노드 여정의 1단계는 주교회의의 결정적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고, 대륙 단계에서 시노달리타스와 단체성의 모습이 필요함을 드러나게 하였다. 이 단계에서 운영되는 조직들은 지역 현실과 토착화 과정을 존중하면서 시노달리타스 실현에 기여한다. 시노드 총회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 통치에서의 획일성과 중앙집권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루어야 할 질문
5) 새로운 구조를 만들기에 앞서, 기존의 구조들을 강화하고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회 연합과 관련된 구조들이 더욱 온전히 시노달리타스의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그러한 구조 개혁이 지니는 함의를 교회론적, 그리고 교회법적 차원에서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6) 일천년기 교회의 시노드 실천을 보면서, 고대의 제도들이 주교회의처럼 새로 만들어진 제도와 조화를 이루면서, 현재의 교회법적 규정 안에 복원될 수 있는지 연구하도록 제안한다.
7) 지역 교회 상황에서 나타나는 교리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단체적 행위를 할 가능성을 인정하여 자의 교서 「주님의 사도들」(Apostolus Suos)에 대한 성찰을 재개하면서, 주교회의의 교리적 그리고 재치권적 성격에 대한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8) 최근 열린 호주의 전체(전국) 공의회에서 나온 자료를 예시로, 개별 공의회들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의 참여 확대를 실현할 수 있도록, 개별 공의회(전체 공의회와 관구 공의회)에 대한 교회법을 재고하여야 한다.
제안
9) 교회법에서 이미 규정한 구조들 가운데 교회 관구를 그 지역 내 지역 교회들의 친교의 장으로서 강화할 것을 제안한다.
10) 교회들의 연합체 형태에 대하여 요청된 심화 연구를 바탕으로, 광역, 국가, 대륙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여야 할 것이다.
11) 필요한 경우, 어떤 주교회의에도 속하지 않는 주교들을 위하여 그리고 국경을 초월한 교회들의 친교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국제 교회 관구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12) 라틴 예법의 국가에 동방 가톨릭 교회도 존재하는 경우, 동방 주교들도 그들 자신의 교회법에 따라 정하여진 통치의 자치를 온전히 보존하면서 국가 주교회의에 포함되어야 한다.
13) 각 대륙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주교회의들과 교회들의 참여를 고려하여,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그들 고유의 대리자들로 이루어진 대륙 회의의 교회법적 형태를 구상하여야 한다.
20. 세계주교시노드와 교회 회합
수렴
1) ‘함께 걷기’의 피로감을 경험하였을 때에도, 시노드 총회는 하느님 백성 됨이라는 복음적 기쁨을 맛보았다. 시노드 여정의 이 순간을 위하여 제안된 새로운 것들은 전반적으로 환영받았다. 가장 뚜렷한 것은 다음과 같다. 교황령 「주교들의 친교」(Episcopalis Communio)에서 말한 것처럼, 사건에서 과정으로 시노드 거행의 전환, 주교와 함께 다른 대의원들 곧 여성과 남성의 참석, 형제 대표들의 능동적 참석, 시노드 총회 준비를 위한 영성 피정,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성찬례, 기도의 분위기와 성령 안에서의 대화 방법, 바오로 6세 홀에서 개최된 시노드 총회 자체.
2) 세계주교시노드 총회는 주교적인 고유의 뚜렷한 특성을 보존하면서, 이 기회에 교회의 삶의 시노달리타스 차원(모든 이의 참여), 단체성의 차원(온 교회를 위한 주교들의 염려), 수위권적 차원(로마 주교의 봉사, 친교의 보증) 사이의 내적 유대를 잘 드러냈다.
3) 시노드 과정은 우리를 격려한 은총의 시간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의 삶과 사명의 방향을 인도할 수 있는 시노달리타스의 새로운 문화를 경험할 기회를 선사하고 계시다. 그러나 선교적 시노달리타스로의 개인적 회심이 없다면 공동 책임성의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하였다. 모든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의 활동은 직무와 은사를 통하여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개인적 책임성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촉구한다.
다루어야 할 질문
4) 주교들과 더불어 시노드 여정의 증인의 자격으로 다른 대의원들이 참석한 것에 감사한다. 그럼에도 정회원으로서의 그들의 참석이 시노드 총회의 주교적 특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떤 이는 주교의 특별한 임무가 적합하게 이해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고 여긴다. 또한 주교가 아닌 이들이 어떤 기준에 의하여 시노드 총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도 더 명확하게 하여야 한다.
5)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 교회 제1차 총회, 브라질에서의 하느님 백성의 조직들, 호주 전국 공의회 같은 경험들이 언급되었다. 결정 작업에 하느님 백성 모든 구성원의 참여를 (부적절한 분리 없이) 주교의 특별한 임무와 구분하면서, 앞으로 시노달리타스와 단체성을 어떻게 심화하고 발전시킬지 규명하여야 한다. 시노달리타스, 단체성, 수위권의 표현은 정적이거나 직선적 방식이 아니라 분화된 공동 책임성 안에서 역동적 순환성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6) 지역 차원에서 (교회 총회에 이어 주교 총회로 이어지는) 연속적 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톨릭 교회 전체와 관련해서 제안될 수 있을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번 시노드 총회에서 채택한 형식이 이 필요에 부응한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식별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교회 총회에 이어 주교 총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어떤 이는 아직 시노드 총회 대의원의 역할을 주교에게 유보하는 것을 선호한다.
7)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특히 신학자와 교회법 학자들이 시노드 총회 작업과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과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도 심화하고 명료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8) 또한 인터넷과 소통 매체들이 시노드 여정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제안
9) 교회의 모든 차원에서 시노드 과정에 대한 평가가 보장되어야 한다.
10)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제1회기의 성과를 평가하여야 한다.
여정을 계속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마르 4,30)
주님의 말씀은 교회의 온갖 말보다도 우선한다. 제자들의 말, 시노드의 말도 단지 주님께서 몸소 말씀하신 것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삶의 근본적 경험 안에서, 곧 자연의 표징, 노동의 행위, 일상의 현실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한 표상들을 발견하셨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초월하지만 낯선 것이 아님을 말씀하여 주셨다. 우리는 세상일들 안에서 그것을 보기도 하고 결코 그것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떨어진 하나의 씨앗에서 당신 운명이 표현되는 것을 보셨다. 겉으로는 썩을 운명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씨앗은 멈출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부활의 생명의 역동성을 품고 있다. 생명을 주어 많은 이를 위한 빵이 되도록 운명 지어진 역동성이다. 성체가 되도록 운명 지어진 역동성이다.
오늘날, 패권을 위한 투쟁과 가시적인 것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온 힘을 다하여 그 말씀을 되살리라는 부름을 받았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주님의 이 질문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작업을 밝힌다. 효율적, 절차적 논리를 따라 다방면으로 흩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보고서의 많은 말들과 제안들 가운데에서 작지만 미래를 담고 있는 씨앗을 모으고, 많은 이의 삶을 위하여 그것을 성숙하게 할 토양에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상상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나자렛의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서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 대답은 오직 하나, 성령의 그느르심 아래 머물고 그분의 힘이 자신을 덮으시도록 내맡기는 것이다.
제2회기까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께 지금까지 진행된 여정과 그 여정에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린다. 우리는 앞으로 이어질 단계를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의 여정에서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징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와, 오늘 우리가 그 축일을 지내는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의 전구에 맡겨 드린다.
“주 성령님, 저희가 주님 앞에 있나이다!”(Adsumus Sancte Spiritus!)
로마에서
2023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