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선종 400주년 기념 교황 교서
모든 것이 사랑에 속합니다
(Totum Amoris Est)
“모든 것이 사랑에 속합니다”(Totum amoris est). 4세기 전인 1622년 12월 28일에 리옹에서 선종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우리에게 남긴 영적 유산은 이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50세가 넘었고 20년 동안 제네바의 ‘망명’ 주교이자 군주였던 살레시오 성인은 마지막 외교 사명을 위하여 리옹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모리스 드 사부아 추기경을 아비뇽까지 수행해 달라는 사부아 공작의 요청을 받고, 아비뇽으로 가서 추기경과 함께 젊은 왕 루이 13세를 알현하고 프랑스 남부에서의 승전보에 따라 론 계곡을 지나 파리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지치고 허약해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순수한 섬김의 정신으로 그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저는 분명 그 일을 마다할 타당한 근거를 많이 들 수 있습니다만,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죽어서든 살아서든 거절하지 않고 그곳에 가겠습니다. 끌려서라도 가겠습니다.” 그것이 살레시오 성인의 성품이었습니다. 리옹에 도착한 성인은 성모 마리아 방문 봉쇄 수녀회 수도원의 정원사 집에 머물렀습니다.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 누구든 자신을 만나려는 이를 자유롭게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궁정의 덧없는 영광”에 오랫동안 환멸을 느꼈던 성인은 밀려드는 일들, 곧 영적 우정의 편지는 물론 고해성사와 대화, 회의와 설교로 바쁘게 사목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 마지막 나날을 보냈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으로 충만한 이러한 생활 방식의 근본적 이유가 성인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성인은 유명한 그의 저서 「신애론」(Traité de l’amour de Dieu)에서 이를 단순하고 정확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하느님을 생각해 보아도 인간은 곧바로 감미로운 감정을 마음에 느낍니다. 이 감정은 하느님께서 인간 마음의 하느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이 말씀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요약합니다. 하느님 체험은 인간 마음의 고유한 것입니다. 이는 정신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경외와 감사 가득한 인식입니다. 마음 안에서 그리고 마음을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을 알게 되는 섬세하고 강렬하며 통합된 과정이 일어납니다. 동시에 사랑으로의 부르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은 물론 자신의 기원과 심오함, 그 완성을 깨닫게 되는 동일한 과정이 일어납니다. 이를 통하여 신앙은 맹목적인 감정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자세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마음가짐을 통하여 인간은 성인이 즐겨 말하던 “감미로운 감정”으로 인간의 의식에 와 닿아 모든 피조물을 향한 마땅하고도 변치 않는 호의를 일깨울 수 있는 진리에 자기 자신을 의탁합니다.
이에 비추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하느님을 찾고 또 다른 이들이 하느님을 찾도록 돕는 데에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다고 여겼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신과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키움으로써 이것을 배웠습니다.
일상의 일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깊은 인식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리옹에서 보낸 마지막 시기에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성인은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방문 수녀회 수녀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라.’라고 했던 두 마디로 저는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는 “겸손 없는 의지”, 곧 그저 단순한 주의주의(voluntarism)가 아니었습니다. 겸손 없는 의지는 성덕의 길에 도사리고 있는 은밀한 유혹으로서, 성덕을 자기 힘을 통한 의화, 인간 의지와 그 능력을 향한 숭배와 혼동하게 합니다. 결국 이는 “참다운 사랑은 조금도 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자만으로 이어집니다.” 성인의 이러한 인식은 순전한 정적주의(quietism), 곧 육신과 역사에서 떼어낸 교리에 수동적이고 아무 감정 없이 자신을 내맡기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강생하신 성자의 생애를 관상하여 얻은 열매였습니다. 12월 26일, 살레시오 성인은 성탄의 신비를 체험하며 수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이 보입니까? 아기 예수님은 이 계절의 모든 불편함, 곧 살을 에는 추위와 당신에게 일어나도록 성부께서 허락하신 모든 일을 받아들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성모님께서 주시는 작은 위안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아기가 어머니 가슴으로 손을 뻗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보살핌과 관심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고 듣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 계절의 살을 에는 추위든 불편함이든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는 모든 것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인간적 측면에의 고려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기울였던 관심은 감동적입니다. 성인은 강생의 학교에서 확신과 신뢰로 역사를 해석하고 삶에 접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랑의 기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체험을 통하여, 열망이 모든 참된 영성 생활의 뿌리이기도 하지만 영성 생활을 해치는 원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인은 앞 세대의 영적 전통에서 풍성한 결실을 거두면서도 식별을 계속 수행하여 열망을 꾸준히 점검해야 하는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살레시오 성인은 이러한 평가의 궁극적 기준을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선종 이틀 전인 성 스테파노 축일에 리옹에서 참여한 마지막 회의에서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일을 완성시켜 줍니다. 여러분에게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순교의 고통을 사랑 한 줌으로 견디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많은 공로를 쌓은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큰 것을 내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 생채기라도 사랑 두 줌으로 견디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공로를 쌓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애덕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탁월한 현실감으로 관상과 행동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나갔습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알아야만 합니다. 관상 그 자체는 행동 또는 행동하는 삶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삶 안에서 (하느님과) 더욱 깊은 일치를 찾는다면 그것이 더 낫습니다. 주방에서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은 한 자매가 다른 자매보다 더 큰 사랑과 애덕을 가졌다면, 그 물리적 불은 그 자매에게 하느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데에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종종 사람은 고독은 물론 행동 안에서도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며, 결국 가장 큰 사랑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문제로 언제나 귀결됩니다.” 이는 온갖 형태의 쓸데없는 엄격성이나 자기 몰두보다 훨씬 중요한,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가장 큰 사랑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결정, 모든 상황에서 끊임없이 물어보십시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하느님 사랑의 박사”로 부르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단지 성인이 사랑에 관하여 중요한 논문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랑의 탁월한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글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사와 동떨어져 책상머리에서 지어낸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참으로 체험에 대한 세심한 경청에서 생겨났습니다. 성인은 성령께서 밝혀 주시어 자신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사목 활동 안에서 명철하게 실천하고 이해한 것을 교리로 옮겼습니다. 이와 같은 전개 방식이 「신애론」 서문 안에 종합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사랑에 속하고 사랑 안에 살아 있으며,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지고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어린 시절 교육: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알아가는 모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8월 21일에 토랑스 인근에 있는 샤토 드 살에서 부아시의 영주 푸랑수아 드 누벨과 프랑수아즈 드 시오느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생애는 16세기와 17세기의 두 세기에 걸쳐 이어집니다. 그는 인문주의의 유산과 신비주의 사조 고유의 절대자를 향한 노력을 중재하여, 저물어가던 세기의 가르침과 문화적 성취의 장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성인은 먼저 라 로슈쉬르포롱 학교에서, 이후 안시 학교에서 초기 양성을 받고, 파리에 가서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클레르몽 예수회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종교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 왕국의 수도에서 그는 자신의 생애에 두고두고 흔적을 남길 두 가지 내적 위기를 연달아 겪었습니다. 그가 생테티엔데그레 성당에서 파리의 검은 성모님 앞에 바친 열정적인 기도는 마음이 캄캄할 때에 그의 내면에서 꺼지지 않고 타올라 자신과 다른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불을 지펴 주게 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손길로 모든 것을 잡아 주시고, 주님의 길은 모두 정의와 진리이니 ……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겠나이다. …… 오 저의 하느님, 저는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언제나 하느님 자비를 바라며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겠나이다. …… 오 주 예수님, 주님께서는 산 자들의 땅에서 한결같이 저의 희망이고 저의 구원이시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평화를 되찾고 일지에 그렇게 적었습니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수반된 이 위기의 체험이 성인에게 언제나 빛으로 남아,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의 신비에 다가갈 탁월한 길을 주게 됩니다. 성인이 다른 이들의 삶에 귀 기울이고, 세심한 식별로 사고와 감정, 이성과 감성을 통합하는 내적 자세를 깨닫도록 도움을 준 것입니다. 성인은 이 내적 자세를 “인간 마음의 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결코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이론적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총의 열매인 특별한 무엇인가를, 곧 자신과 다른 이들의 생생한 체험을 하느님 안에서 식별하는 능력을 배웠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결코 신학적 체계를 발전시키자고 주장한 적이 없지만, 영성 생활에 관한 그의 성찰은 탁월한 신학적 중요성을 지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성찰은 모든 참된 신학이 지니는 본질적인 두 측면을 구체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측면은 영성 생활 그 자체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열고 겸손과 인내로 바치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고 전하려 노력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기도의 용광로에서 생겨납니다. 두 번째 측면은 교회 생활입니다. 곧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느끼기입니다. 신학 자체는 개인주의적 문화의 영향을 실감하여 왔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말씀의 빵을 쪼개며 그 공동체에 깊이 들어가 일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두 측면은 당대 학자들의 논쟁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학자들의 논쟁을 존중했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사상을 특징지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의 발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인문학 과정을 이수한 다음에 파도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안시에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이미 삶의 방향을 결정한 뒤였습니다. 성인은 1593년 12월 18일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초에 클로드 드 그래니에 주교의 초대로, 안시 교구 관할 지역이자 칼뱅파 지역으로 전쟁과 평화협정의 복잡한 미궁에 빠져 다시 한번 사부아 공작의 지배 아래 놓인 샤블레에서 어려운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중재자이자 대화의 사람으로서 재능을 발견한 동시에 훗날 깨닫게 되는 분명한 비타협성도 발견한 강렬하고 극적인 시기였습니다. 어디에나 붙이고 심지어 현관문 아래 밀어 넣는 그 유명한 [사목] ‘전단지’와 같은 몇 가지 대담하고 독창적인 사목 실천도 성인이 창안했습니다.
제네바 교구 관할지의 또 다른 정치적 종교적 지세 변화에 따라, 성인은 사도좌의 구체적인 지시로 드 그래니에 주교를 대신하여 민감한 외교적 사명을 수행하는 임무를 띠고 1602년에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프랑스 국왕의 선의에도 그의 사명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성인은 클레멘스 8세 교황께 편지를 썼습니다. “총 9개월이 지나고 저는 거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에게도 교회에도 그 사명은 인간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뜻밖의 풍요로움으로 드러났습니다. 성인은 외교 협상 때에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프랑스 국왕과 그 신하들 앞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성인은 중요한 친분을 맺었고 무엇보다 이 왕국의 근대적 수도에 놀라운 영적 문화적 봄을 가져오는 데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세상에 떠오르는 큰 문제들에, 그 문제들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에, 그리고 새롭고도 두드러진 영성에 대한 관심에, 그리고 그러한 관심이 제기한 미증유의 질문들에 감명받고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한 마디로 성인은 옛 언어로도 새 언어로도 모두 응답하기를 요구하는 진정한 ‘시대 전환’을 감지한 것입니다. 성인이 열성적인 그리스도인 개인을 만난 것은 분명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제 모든 상황이 달랐습니다. 파리는 더 이상 그가 교육받던 시절에 알던 종교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 아니면 샤블레에서 보던 격렬한 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뜻밖의 것을 마주쳤습니다. 바로 “성인들, 모든 곳에 있는 수많은 참다운 성인들”이었습니다. 문화계 인사들, 소르본 대학 교수들, 행정 당국자들, 왕자와 공주들, 시종과 시녀들, 남녀 수도자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를 대면한 일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섭리의 사건들이었습니다. 쓸모없고 헛된 것처럼 보였던 날들이 시대 정신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시대 정신을 읽는 비길 데 없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능수능란하고 지칠 줄 모르는 논객이던 성인은 은총을 받아 통찰력이 뛰어난 시대의 관찰자요 영혼들의 탁월한 지도자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녀와의 만남과 1610년 방문 수녀회 설립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사목 활동, 위대한 저술들(「신심 생활 입문」[l’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과 「신애론」), 수도원과 봉쇄 수도원에, 남녀 수도자에게, 궁정 관리와 일반 대중에게 보낸 영적 우정에 관한 수천 통의 편지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그러한 내적 돌아섬과 별개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레시오 성인 안에서 복음과 문화가 풍성한 종합을 이루었고, 구현이 된다면 풍성하고 지속적인 수확을 거둘 방법론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다른 방법론과는 구별되고 참다운 개혁을 목표로 한 ‘자신의 방법론’에 대하여, 파리에서 방문하였던 수도 공동체에 보낸 영성 지도와 영적 우정에 관한 초기 편지에서 겸손히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엄격함을 버리고 신실한 영혼에 어떤 약함이 있더라도 그 품위와 자격을 온전히 존중하는 방법론이었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의 개혁에 또 다른 어려움이 제기되지 않을까 미심쩍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어려움을 끼친 이들은 아마 상처 치료를 너무 거칠게 했을 터입니다. …… 비록 그들의 방식은 특히 여러분처럼 고상하고 양식 있는 영들에게 제가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도 저는 그들의 방식을 존중합니다. 저는 병을 단지 제시하기만 하고 그들의 손에 수술칼을 쥐어 주어 필요한 절제를 그들 스스로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까닭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개혁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살레시오회의 낙관주의를 유명하게 만들어, 약 2세기 뒤에 요한 보스코 성인이 그랬듯이 후대에 꽃피움으로써 영성의 역사에 한 획을 길이 남긴 그 통찰력이 이 글에서 드러납니다.
안시로 돌아온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같은 해인 1602년 12월 8일에 주교품을 받았습니다. 당대에 그리고 이후 몇 세기 동안 성인의 주교 직무가 유럽에 미친 영향력은 막대하였습니다. “그는 사도요 설교가이자 저술가이며, 행동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헌신하였고, 필요한 신학적 논박 외에도 인격적 관계와 애덕의 효과를 더욱더 깊이 체험하면서 개신교도들과 대화하고 논쟁하였으며, 유럽 내 외교 사명 그리고 중재와 화해의 사회적 사명을 맡았습니다.” 그 무엇보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갈망의 시대에 시대 변화의 해석자요 영적 안내자였습니다.
애덕은 자녀를 위하여 모든 일을 합니다
1620년에서 1621년 사이, 삶의 끝자락에 다가서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시대의 전망을 밝혀 주는 편지를 자신의 교구 신부에게 보냈습니다. 새로운 질문들에 응답하고자 새롭게 글을 쓰려는 그 신부의 열망을 격려하고, 그러한 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려 준 것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이 사실을 꼭 말해야겠습니다. 세상 분위기를 날마다 더욱 잘 알게 될수록 나는, 좋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어떤 종에게 이 불쌍한 세상의 취향에 합당한 글을 쓰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실 것을 더 열렬히 바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러한 격려의 이유는 시대에 대한 그의 고유한 전망에 있었습니다. “세상은 너무도 예민해지고 있어서 조금만 지나면 아무도 벨벳 장갑 없이 손대거나 향 반창고 없이 그 상처를 돌볼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치유받고 마침내 구원받는다면야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우리의 모후인 애덕은 자녀를 위하여 모든 일을 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습관적인 말이나 패배 앞에서 보이는 체념의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행 중인 세상의 변화에 대한, 그리고 그 변화를 살아가는 방법을 완전히 복음적으로 깨달아야 할 필요성에 대한 직관의 표지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일찍이 그러한 깨달음에 이르렀고 이를 「신애론」 서문에 밝혔습니다. “저는 이 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유념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을 쓰는 이가 자기 시대를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독자의 관대함을 청하며 그는 글을 이어갔습니다. “저의 문체가 「신심 생활 입문」과 좀 다르다는 점을, 그리고 그 두 문체 모두 「십자가 수호」(Défense de la Croix)의 문체와 다르다는 사실을 감지한다면, 19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잊었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전쟁의 언어는 평화의 언어와 다릅니다. 또한 젊은 수련생들에게 말하는 방식과 나이 든 동료들에게 말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에 응답할 때,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그 시작은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 그 자체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신애론」의 궁극적 의도는 이것입니다. “저의 의도는 단순하고 솔직하게 아무것도 보태지 않고 분명 거짓 꾸밈없이, 하느님의 사랑의 탄생과 성장과 약화, 작용과 속성, 특전과 숭고한 특징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시대적 전환의 요구들
저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선종 40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성인이 우리 시대에 남긴 유산에 대하여 자문해 보았습니다. 저는 성인의 유연성과 선견지명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느 모로는 하느님 은총으로 또 어느 모로는 자신의 성격 덕분에, 또한 삶에 대한 체험이 꾸준히 늘어감으로써 성인은 시대의 변화를 명확하게 인식하였습니다. 그러한 변화가 복음 선포에 크나큰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성인 자신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인이 어릴 때부터 사랑해 왔던 하느님의 말씀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안에서 이제 그에게 예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시대적 전환기의 우리에게도 같은 임무가 기다립니다. 곧 우리는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은 교회, 온갖 세속적인 것에 자유롭지만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교회, 민족들과 삶을 나누고 함께 걸어가며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자기 시대의 사건들을 식별하면서 수행하였던 바로 그 일입니다. 성인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구조, 그리고 사회적 이미지에 전전긍긍하는 데에서 벗어나 오히려 우리 시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영적 필요와 기대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중대한 결정 가운데 일부를 되짚어 보는 것이 우리 시대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지혜로 오늘날의 변화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바람과 날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그 결정들 가운데 첫 번째는,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아름다움을 재해석하여 구체적인 상황에 놓인 각각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인의 「신애론」의 궁극적 이유와 실제적 목적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매력을 밝혀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사용하는 하느님 섭리의 ‘끈’은 무엇입니까?” 살레시오 성인은 호세아서 말씀을 들어(호세 11,4), 그러한 일상적 수단들을 “인간성과 사랑과 우애의 끈”이라 정의합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분명, 황소처럼 쇠사슬로 잡아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초대와 매력과 거룩한 영감으로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로운 인간 본연의 마음에 맞갖은 아담의 끈이고 인정의 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끈들로 당신의 백성을 종살이에서 풀어 주셨고,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손을 잡아 이끌고 길을 걷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외압과 전제적 독단적 권력 또는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설득력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인은 분명 자신이 마주쳤던 삶의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하면서 계속 써나갑니다. “은총의 힘은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반대로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은총은 우리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유를 사랑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강제력을 지닙니다. 은총은 강력하지만, 우리의 뜻이 그처럼 강력한 힘에 압도되지 않도록 매우 부드럽게 작용합니다. 은총은 우리를 다그치지만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의 모든 힘 앞에서 우리 뜻대로 그 다그침에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조류학에서 가져온 흥미로운 예시로 일찍이 이 관계에 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테오티모 님,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족류’로 부르는 어떤 새들이 있습니다. 이 새들은 마치 아예 없는 듯한 쓸모없는 짧은 다리와 약한 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 새들은 다리나 발을 쓰지 않고 날아올라 날개를 펼 수 없기에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땅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많은 다른 것들에게 그러하듯이 그 새들의 무력함을 만회하여 주는 돌풍으로 그들을 들어 올려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땅에 머물러 있다가 그대로 죽습니다. 그런 때에 그들이 바람이 주는 동력에 응답하여 날개를 펄럭인다면 바람 자체도 끊임없이 그들을 도우러 와, 그들이 그 조력을 통한 비행으로 점점 더 높이 날 수 있도록 밀어줄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아올라 사랑에의 부르심 안에서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펼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된 인간은 땅에 쓰러졌을 때에 두 날개를 펼치도록 성령의 바람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날지 못할 위험에 놓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인간성과 사랑을 결합하는 끈, 곧 ‘아담의 끈’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다시 날게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능이 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비상을 향한 동의의 자유가 침해당하거나 무위로 돌아가지 않게 합니다.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는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은총은 인간을 일어나도록 움직일 수 있지만, 인간 없이 곧 인간이 자신의 동의 없이 일으켜 세워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글을 이렇게 마칩니다. “테오티모 님, 하느님의 영감은 우리보다 앞서며 우리가 그 영감을 인식하기도 전에 먼저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영감을 인식하게 되면 그 이끄심에 동의하고 따를지 아니면 거부하고 거절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영감은 우리가 없어도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 없이 우리의 동의를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늘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를 입증하는 무상성을 체험합니다.
동시에 이 은총은 우리를 결코 수동적이게 하지 않습니다. 이 은총은 우리를 이끌어 하느님의 사랑이 본질적으로 우리보다 앞서며, 하느님의 첫 번째 선물은 바로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하느님께서 불어주시는 바람 앞에서 굳건한 신뢰로 두 날개를 펼쳐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데에 협력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소명의 중요한 측면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창세기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맡기신 임무는 번성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로부터 그리고 피조물과 함께 만들어간다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피조물을 변화시키고 건설하고 지배하는 임무가 인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인간 존재가 수동적 구경꾼이 되어 버리는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인공입니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우리는 공동 창조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깨달았고, 영성 지도의 직무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참다운 신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매우 중대한 두 번째 결정은 신심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새로운 시대가 동트면서 수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문제의 두 측면은 오늘날에도 이해하고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측면은 신심이라는 개념 자체와 관련되고, 두 번째 측면은 신심의 보편성과 대중성에 관련됩니다. 성인은 「신심 생활 입문」의 서두에서 신심의 의미를 명확히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심의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참다운 신심은 유일하며, 그 밖에는 수많은 그릇되고 헛된 신심들이 있습니다. 그대가 참다운 신심을 구별할 수 없다면, 오류에 빠지고 쓸모없고 미신적인 몇몇 신심들을 뒤쫓는 데에 시간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그릇된 신심에 대한 성인의 설명은 유쾌하고도 늘 시의적절합니다. 성인은 건강한 유머로 간을 맞추기 때문에 모든 이가 성인의 설명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단식에 열중하는 어떤 이는 자기 마음에 괴로움이 가득하여도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신실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는 절제를 사랑하며 술 한 방울 또는 물조차 자기 혀를 적시게 두지 않으려 는 반면, 험담과 비방으로 자기 이웃의 피로 혀를 흠뻑 젖게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는 종과 이웃들을 향하여 다른 시간 내내 자신의 혀가 퍼붓는 악하고 교만하며 상처 주는 말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온종일 기도문을 암송하기 때문에 자신을 신실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기꺼이 지갑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하지만 그 마음에서는 자기 원수를 용서하려는 온유함을 손톱만큼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원수를 용서한다면서 빚은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가 빚을 갚게 하려면 소송이 필요할 것입니다.” 분명 이는 언제나 악습이고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성인은 이렇게 끝맺게 됩니다. “이 모든 훌륭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신실하다고 여겨지지만 대부분 분명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참다운 신심의 근원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 가장 깊은 뿌리는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에 있습니다. “참되고 살아 있는 신심은 ……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오히려 이는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참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생생한 표현 안에서 신심은 “간단히 말하자면, 일종의 영적 깨어 있음이자 활력으로, 이를 통하여 애덕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거나 우리가 신속함과 애정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신심은 애덕과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덕의 드러남이며 동시에 애덕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불과 불꽃의 관계와 같습니다. 신심은 질적인 변화를 주지 않고 애덕을 더욱 세차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애덕과 신심은 불과 불꽃처럼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덕은 영적인 불이고, 그 불이 강한 불꽃으로 타오를 때에 이를 신심이라고 부릅니다. 신심은, 애덕이 준비되고 활기 띠고 부지런하게 하는 불꽃 외에는 애덕의 불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고와 영감을 실천하는 데에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신심은 전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활양식 곧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현실 속에 녹아든 삶의 방식이 됩니다. 신심은 음식과 복장, 일과 휴식, 사랑과 출산,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성실성 같은 소소한 일들 안에서 의미를 받아들이고 발견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신심은 저마다의 소명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신심의 대중적 측면을 보기 시작하고, 이는 「신심 생활 입문」의 도입부부터 드러납니다. “신심에 대하여 논해 왔던 거의 모든 사람이 속세를 떠나 살아가는 이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또는 적어도 그러한 고립으로 이끄는 신심을 가르쳐 왔습니다. 저는 도시, 가정, 궁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형편상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합니다.” 신심이 조용하고 격리된 환경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큰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신심은 온갖 상황에서 모든 이를 위한 것이기에 우리 저마다 소명에 따라 이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말씀하셨듯이, “거룩함은 특정 계층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루카 14,10)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는 긴급한 초대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어도 하느님의 산에 오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귀족, 장인, 시종, 왕자, 과부, 젊은 여인, 부인은 저마다 신심을 다르게 실천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신심의 실천은 저마다 능력, 직업, 소임에 따라야 합니다.’” 세속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내적 삶을 성장시키는 것, 모든 생활 신분에서 완덕에의 열망을 가지게 하는 것,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키지 않고 세상 안에 살아가며 세상을 존중하는 법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세상과 올바른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알려 주는 내적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목표였고, 우리 시대 모든 이에게도 여전히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성덕의 보편 소명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크고 많은 구원의 수단을 갖춘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생활 신분이나 처지에서든,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성덕에 이르도록 저마다 자기 길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습니다.” 저마다 자기 길에서, “도달할 수 없어 보이는 성덕의 표양들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여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인 교회가 우리에게 그 표양들을 제시하는 것은,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하여 정하신 유일하고 특별한 길을 걸어가도록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저마다 자기 길을 식별하여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안배해 주신 지극히 개인적 은사인(1코린 12,7 참조) 자신의 최고 장점을 발휘하는 일입니다.”
삶의 황홀경
따라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완전한 그리스도인 삶을 “활동과 삶의 황홀경”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쉬운 현실 도피나 내적 은둔과혼동되어서는 안 되었으며, 따분하고 지루한 순종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이 신앙생활에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부활 시기 없이 사순 시기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한편, “신앙의 기쁨이 더디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확고한 신념으로서, 극심한 비탄 속에서도 서서히 되살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만발하도록 하는 것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말한 “활동과 삶의 황홀경”을 의미합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공손하고 정직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초인적이고 영적이며 신실한 황홀경의 삶, 곧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타고난 조건을 벗어나고 초월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신애론」의 핵심이며 가장 빛나는 부분에 있습니다. 황홀경은 단순한 순종의 평범함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인 삶의 충만한 기쁨으로 제시됩니다. “도둑질하지 않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헛된 맹세를 하지 않는 것,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 살인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타고난 이성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재산을 모두 포기하는 것, 가난을 사랑하는 것, 가난을 지극히 감미로운 주인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모욕과 멸시와 비하, 박해와 순교를 기쁨이자 참행복으로 여기는 것, 절대적 정결의 한계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 끝으로 세상 안에서 그리고 죽을 운명의 삶 안에서 세속의 온갖 견해와 가르침에 맞서고 현세적 삶의 흐름을 거슬러 우리 자신에 대한 포기, 끊어버림, 극기를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것, 이는 인간 본성에 따라 살지 않고 인간 본성을 넘어서는 삶입니다. 우리 안의 삶이 아니라 우리를 벗어나 우리를 뛰어넘는 삶입니다. 영원하신 성부께서 끌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누구도 이처럼 자기 자신을 넘어서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삶의 방식은 끊임없는 탈혼이자 활동과 작용의 영원한 황홀경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온갖 메마름과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려는 유혹을 거슬러 기쁨의 원천을 재발견하는 삶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 버립니다. 이는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위험입니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활동과 삶의 황홀경”의 설명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두 가지 설명을 추가합니다. 첫 번째는 이러한 삶의 방식의 진정성을 식별하기 위한 실제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설명이고, 두 번째는 가장 심오한 원천에 관계되는 설명입니다. 성인은 그 식별 기준으로 이러한 황홀경에는 참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수반되는 한편 이것은 삶에서의 도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날 위험에 놓이지 않도록 우리는 이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도 속이고 있습니다.우리는 여기에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참된 신심의 잣대로 삼았던 기준과 동일한 것을 발견합니다. “기도 안에서 탈혼에 들고 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벗어나고 넘어서 하느님께로 오르지만, 삶의 황홀경은 얻지 못하는 사람, 곧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애덕을 통하여 …… 하느님께 오르고 도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테오티모 님, 나를 믿으십시오. 그의 모든 탈혼이 매우 의심스럽고 위험합니다.” 그의 마무리 말은 신랄합니다. “기도 안에서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만 삶과 행실에서는 자기 자신 이하로 떨어지는 것, 묵상에서는 천사와도 같지만 대화에서는 야만적인 것은 …… 이와 같은 탈혼과 황홀경이 악령의 유희요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참 징표입니다.” 근본적으로 이는 이미 바오로 사도가 ‘사랑의 송가’에서 코린토인들에게 상기시킨 것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2-3).
그렇기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황홀경이 없어서는 안 되며, 삶이 없는 황홀경도 참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황홀경 없는 삶은 맹목적 순종, 기쁨을 잃은 복음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반면, 삶이 따르지 않는 황홀경은 악마의 환상과 기만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커다란 양극성은 서로 안에서 녹아 없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극성이 서로의 참됨을 지켜 줍니다. 그리하여 진리는 정의 없이 존재하지 않고, 기쁨은 책임감 없이, 자율성은 법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슬기롭게, 이 황홀경의 가장 심오한 원천을 강생하신 성자께서 드러내 보여 주신 사랑에서 찾습니다. 참으로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고 느끼며 함께 감동하는 우리의 신심 생활이나 영성 생활의 으뜸 행위이자 으뜸 원칙”이며, “영성 생활은 우리의 감정적 움직임과 같다.”라고 하면, “감정 없는 마음에는 사랑도 없다.”는 사실과 “사랑을 품은 마음에는 감정의 움직임이 없을 수 없다.”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마음을 매혹시키는 이 사랑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사랑만큼 인간 마음을 다그치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 안에서 지극히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선익을 위하여 우리 가운데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이 말씀은 지극한 감동을 줍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인류의 관계에 대한 명확하고 통찰력 있는 이해와 더불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과 주 예수님 사이의 깊은 사랑의 유대 또한 밝혀 줍니다. 활동과 삶의 황홀경은 추상적 실재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정점을 이룬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빛을 발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 존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광채로 빛나게 합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골고타를 “연인들의 산”이라고 명쾌하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오직 그곳에서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 없이는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구세주의 죽음 없이는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골고타 밖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한 죽음이거나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모두 그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사랑 가운데 잘 선택하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사랑에 관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설교를 상기시키며 「신애론」을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이 사랑보다 더 충실하겠습니까? 사랑은 찰나가 아니라 영원에 충실합니다. 사랑은 다가올 삶에 관하여 모두 믿기에 현세의 삶에서 모든 것을 견딥니다. 또한 그곳에 약속된 모든 것을 바라기에, 이곳에서 참아 내도록 주어진 모든 것을 견딥니다. 단연코 사랑은 스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따르십시오. 또한 사랑에 관하여 거룩히 묵상하며 정의의 결실을 맺으십시오. 지금 제가 여러분께 말하는 것 이상의 사랑에 대한 찬미를 찾는다면 여러분의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이 모든 것이 안시의 거룩한 주교의 삶으로 드러났고 이제 다시 한번 우리 저마다에게 맡겨집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천상 탄일 40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그분을 공경하며 기억합니다. 성인의 전구를 통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하고 충실한 백성의 여정에 성령의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2년 12월 28일
프란치스코
<원문 Apostolic Letter of the Holy Father Francis, Totum Amoris Est on the Fourth Centenary of the Death of Saint Francis de Sales, 2022.12.28., 이탈리아어도 참조>
영어: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apost_letters/documents/20221228-totum-amoris-est.html
이탈리아어: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apost_letters/documents/20221228-totum-amoris-e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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