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생명 주일 담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생애 말기의 윤리적 도전과 생명의 의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제13회 생명 주일입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위협받고 도전받는 이 시기에 생명의 의미와 가치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지난 2022년 6월 15일 국회에서는 이른바 ‘조력 존엄사법’이라는 법안이 발의되었습니다. 이 법안은 말기 환자이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조력 자살을 허용하는 법안입니다. 조력 자살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로 안락사에 해당합니다. 안락사는 의도적으로 자신이나 타인의 생명을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2.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을 법제화하려는 시도는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생애 말기가 무의미하며 죽음조차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가 절대적이며 고통은 어떤 의미나 가치도 없다는 실용주의와 공리주의적 사고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고통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없애야 할 해로운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의학의 발전으로 점점 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있지만, 고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종교적인 시각은 그만큼 잃어 가고 있습니다.
3. 노인 자살이나 노인 고독사도 이러한 문화를 보여 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회원 국가의 평균 자살률의 2배를 웃돌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 또한 OECD 평균의 2.7배에 이르고 있습니다(2019년 기준). 이는 노인들을 그저 사회가 짊어져야 할 짐으로 여기는 ‘버리는 문화’가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버리는 문화’로 말미암아 사회에서 배척된 노인들은 사회적 역할의 상실과 경제적 빈곤으로 삶의 무의미함을 느껴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고령층 1인 가구가 점점 늘고 있다는 사실도 걱정스럽습니다. 고령층 1인 가구는 경제적 빈곤과 질병에 시달릴 위험이 크기 때문에 고독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4. 물질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인간 생명의 시작과 마침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근본적인 가치입니다. 생명이 없다면 인간의 다양한 활동도 사회 공존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국가는 생명 보호를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생명을 침해하는 범죄를 엄중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법은 타인의 자살을 돕는 ‘자살 방조’도 처벌하고 있습니다. 안락사나 조력 자살의 법제화는 이와 같은 생명 보호의 원칙을 무너뜨립니다.
5.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며 선물을 통해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생명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으며 매 순간 주어지는 생명의 선물을 받으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어 갑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생명의 선물을 거부하는 것이며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6. 교회는 “때때로 죽여 달라는 중환자들의 간청이 안락사에 대한 진정한 원의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것은 거의 언제나 도움과 사랑을 구하는 고뇌에 찬 간원이다”(안락사에 관한 선언 「가치와 권리」, Ⅱ)라고 전합니다. 질병과 고통을 겪는 생명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그 무엇보다 더 많은 관심과 돌봄을 받아야 하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만일 안락사나 조력 자살이 법제화된다면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죽음을 강요받는 상황도 생길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안락사를 선택하여야 할 만큼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호스피스·완화 의료 시설의 확대와 환자를 돌보는 이들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생명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가정에 축복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며, 모든 형제자매가 생명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023년 5월 7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문 희 종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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