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제22회 가정 성화 주간 담화
가정의 소명을 향하여 ‘한 걸음 더’
2022년 한 해를 돌아보는 마지막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며 가정 성화 주간을 맞습니다. 교회는 이 주간에 가정의 소명을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한 걸음 더’ 내딛도록 초대합니다.
지난 6월 ‘가정의 사랑: 성덕의 소명이자 길’이라는 주제로 로마에서 열린 제10차 세계 가정 대회는 모든 가정이 하느님의 부르심이자 성덕에 이르는 길임을 재인식하고, 우리가 모두 가정 사목의 주인공이 되어 성덕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대회 개막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작은 것이라도 ‘한 걸음 더’ 내딛도록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참조)과 같은 교회가 되자고 하시며 가정생활이 성덕에 이르도록 다섯 가지의 ‘한 걸음 더’를 언급하시며 이를 모든 가정에서 함께 실천하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다섯 가지는 혼인을 향한 ‘한 걸음 더’, 십자가를 끌어안기 위한 ‘한 걸음 더’, 용서를 향한 ‘한 걸음 더’, 환대를 향한 ‘한 걸음 더’ 마지막으로 형제애를 향한 ‘한 걸음 더’입니다.
보편 교회의 흐름에 발맞추어 한국 교회에서는 2022년 12월 5일 “혼인은 선물?!”이라는 주제로 주교회의 가정과 생명 위원회 세미나가 열렸고, 유튜브로도 생중계되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성실히 성가정을 일구어 가는 두 부부의 아름다운 고백과 증언을 들었습니다. 한편 ‘4비’(비연애, 비혼인, 비성생활, 비육아)를 외치는 현대 젊은이들의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마음이 무겁기도 하였습니다.
가정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며 사랑이 전수된다는 사실과, 가정이 풍요로운 인간성을 길러 내는 최초의 학교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와 더불어 가정은 사회를 인간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류의 미래가 바로 이 가정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이러한 가정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이 마주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이들이 혼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주저하거나 좌절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둘러싼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서 느끼는 상대적 ‘나약함’ 때문입니다. 이 나약함의 극대화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는 혼인과 가정에 장애가 되는 문제를 계속해서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나약함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나약함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처지입니다. 단순히 상처받기 쉬운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고 만나며 받아들이거나 반응하도록 하는, 심지어는 자신이 상처받을 수 있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타인에게 다가가도록 하는 인간 조건입니다. 나약함은 우리가 인식하고 반응하며 소통하도록, 다시 말하여 사랑하도록 허락하고 촉구합니다. 나약함은 힘이 없다는 부정적 의미만을 가지지 않고 타인의 안녕을 위하여 자신의 미약한 힘을 사용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나약함의 반대는 권력의 부재가 아니라 권력의 남용, 또는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남용이며 지배입니다(교황청 문화평의회, 「필요한 휴머니즘을 향하여」, 50-55면 참조).
신앙으로 바라본 나약함은 인간과 가정이 하느님께 받은 근본적인 소명을 일깨웁니다. “사실 아무도 세상 안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함께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부름받은 다른 이들과 언제나 더불어 살아갑니다”(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모든 이의 선을 위한 종교 자유」, 43항). 나약함은 자신을 엮은 동아줄과 같은 굴레가 아니라, 구상 시인이 노래하는,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보게 하는 ‘꽃자리’입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에게 다가가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나약함은 우리를 살게 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는 힘입니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온갖 위험에 노출된 나약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시련이 닥쳐왔을 때 주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도전에 용감하고 침착하게 맞섰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힘차게 ‘한 걸음 더’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비를 향하여 한 걸음 더, 겸손을 향하여 한 걸음 더, 찬미를 향하여 한 걸음 더, 평화를 향하여 한 걸음 더, 사랑의 실천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 95,15 참조).
가정은 우리 각자가 고유한 방식으로 성덕을 쌓고 성화에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 가정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그 자체입니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도전과 위기에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에 감사하며 나자렛 성가정과 함께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우리의 작은 한 걸음은 가정을 탄생시키고, 가족을 살리며, 가정을 성화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복음화하는 큰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 가정의 모든 걸음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충만하기를 바라며, 새해에도 계획하는 모든 바람이 주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2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정과 생명 위원회
위원장 이 성 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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