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루카 11,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성심을 기억하는 달인 6월은 한국 천주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지구촌에서 가장 오랜 분단의 상황을 겪고 있는 한반도가 이 분단과 휴전을 끝내고 다시 평화로워지기를 기도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북한이 분단의 과정에서 겪은 전쟁과 이념 갈등으로 주고받은 상처와 아픔은 지금까지 한반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상처와 아픔은 마음의 완고함으로 이어지고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합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는 지금 심각한 기후 위기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으로 겪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매년 각국의 군비 증강으로 말미암아 긴장 상태가 거듭되는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에 관한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을 통하여 코로나19 극복과 교회가 새롭게 나아갈 모습 그리고 인류가 더불어 사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길은 이웃을 남이 아닌 형제로 대하고, 세계를 사회적 우애가 펼쳐지는 무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 존엄성을 지닌 형제자매로서 “모든 얼굴과 모든 손과 모든 목소리를 아우르는 인류 가족”(「모든 형제들」, 35항)을 이루도록 함께 꿈꾸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70여 년 동안 갈라져 살아온 남북한의 주민들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시선으로 목소리만 높이면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치의 전제 조건이 화해이듯, 하나 됨의 전제 조건은 평화이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평화로움 속에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이어야 합니다. 평화가 배제된 화해와 일치는 또 다른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이루고자 용서하고 화해하며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황께서는 「모든 형제들」에서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취약성을 연대와 배려의 자세로 돌보자고 권고하셨습니다. 또 세상의 형제애를 위한 종교 간 대화, 사회·정치적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따라서 인류가 한 가족이 되기 위하여 먼저 남과 북이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나눌 것을 제안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나누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야말로 한반도 분단이라는 깊고 긴 어둠을 뚫는 희망의 빛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와 다릅니다. 세상은 힘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지만, 힘으로 이룬 평화는 타인의 고통과 분노 위에 세워졌기에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평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를 일구어 내야만 합니다.
인류 가족을 지킨다는 이유로 참으로 막대한 자원이 우리 삶을 위협하는 최첨단 무기와 핵무기를 보유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기와 다른 군비에 투자할 돈으로 결정적인 기아 퇴치와 최빈국 발전 지원을 위한 ‘세계 기금’을 설립”(2020년 세계 식량의 날 영상 메시지)하자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권고를 받아들인다면 이 얼마나 용기 있는 결정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잠시 멈추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세상에 분쟁의 일상화를 가져왔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해야 연대와 형제애 안에서 참된 평화를 추구하도록 우리가 회심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회심이란 한 개인, 한 민족이 삶과 역사의 흐름까지도 바꿀 수 있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마음들은 화해, 일치, 평화라는 은총들과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위한 기도와 더불어 저마다 삶의 자리인 가정, 이웃, 본당 공동체, 사회에서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들을 실천합시다. 아울러 북쪽의 우리 형제자매들을 기억합시다. 그들과 다양한 형태로 교류하고 공감하며 사랑의 나눔을 통한 연대의 정을 더욱 돈독히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이 말씀은 용서로 얻어지는 화해와 평화에 관한 심오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루카 11,4)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날마다 청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진심을 담은 선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주시는 고귀한 선을 얻어 누리며 사랑과 평화가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지내며,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매일 밤 9시에 바치는 주모경을 절실한 마음으로, 우리의 염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바칠 것을 다짐합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2021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김 주 영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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