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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21년 제55차 홍보 주일 교황 담화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5-06 조회수 : 2566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1년 제55차 홍보 주일 담화

(2021년 5월 16일)


“와서 보시오”(요한 1,46).

 사람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소통하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과 제자들의 감동적인 첫 만남의 한 부분이었던 “와서 보시오.”라는 초대는 모든 참된 인간 소통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되는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려면(2020년 제54차 홍보 주일 담화 참조), ‘이미 알고 있어.’라는 자기 만족감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곧 직접 가서 보고,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언제나 어느 모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에 경이로운 눈을 뜨고, 만물의 새로움과 생기에 손을 내어 맡기어, 여러분의 글을 읽는 다른 이들이 삶의 역동적인 기적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십시오.” 이것은 마누엘 로사노 가리도 복자1)가 그의 동료 기자들에게 한 조언입니다. 그리고 저는 올해 담화에서 “와서 보시오.”라는 초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는 언론, 인터넷, 교회의 일상적 설교, 정치적 사회적 소통 등 투명하고 정직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소통에 영감이 됩니다. “와서 보시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해진 한결같은 방법입니다. 요르단 강가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랬습니다.


발로 뛰어야 합니다


먼저 뉴스 보도라는 큰 사안을 살펴봅시다. 통찰력 있는 목소리들은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뉴스에서 본래 전하던 탐사 보도가 자주 편파적인 이야기에 그 기준을 둔 보도로 대체되고 있다는 위험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우려해 왔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사건의 진실과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더 심각한 사회 현상이나 민중들의 긍정적인 운동을 파악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합니다. 출판·발행 산업의 위기는 결코 ‘발로 뛰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찾고자 또는 어떤 상황을 직접 입증하고자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서 기사 편집실에서, 개인용 또는 업무용 컴퓨터 앞에서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안에서 만들어진 보도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사람을 만나는 데에 열려 있지 않으면, 우리가 증강 현실로 빠져든 것처럼 느끼게 하는 모든 기술 혁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방관자가 될 뿐입니다. 모든 도구는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 없었을 것을 직접 가서 보고,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사를 인터넷에 게재하고, 결코 성사될 수 없었을 만남을 갖도록 해 줄 정도가 될 때에만 유용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인 복음서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이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으로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관계 맺도록 초대하셨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뒤에 이제는 노인이 된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를 쓰며 ‘뉴스 가치가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상기합니다. 그 사실들은 그가 알리는 사건 현장에 직접 있었음을 밝히고 그의 삶에 영향을 준 체험들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요한 1,39). 요한은 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다음 날 필립보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나타나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의적인 그의 친구는 이렇게 묻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필립보는 타당한 이유를 대면서 친구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다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요한 1,45-46 참조). 나타나엘은 가서 보았고,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시작되는 방법이며, 전해지는 방법입니다. 신앙은 말로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비롯된 직접적인 앎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 알게 되었소.” 예수님께서 그 고을에 머무시고 나서 고을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했던 말입니다(요한 4,39-42 참조). “와서 보시오.”라는 말은 상황을 파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모든 메시지를 가장 정직하게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알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말하게 하며 그 사람의 증언이 내 마음에 와닿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언론인들의 용기에 대한 감사 


현실을 전하는 언론은 그 누구도 가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가야 할 능력, 곧 가겠다는 각오와 보려는 의욕이 필요합니다. 이는 호기심, 열린 마음, 열정입니다. 종종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언론인, 촬영기사, 편집자, 연출자와 같은 모든 전문가의 용기와 헌신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이제 우리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박해받는 소수민들이 겪는 고난, 가난한 이들과 환경에 가해지는 수많은 억압과 불의, 보도되지 않았다면 도외시되었을 수많은 투쟁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목소리가 사라진다면, 뉴스 보도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과 민주주의에 큰 손실이 될 것입니다. 곧 온 인류 공동체가 피폐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상황이,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시기에 훨씬 더 많은 상황이 “와서 보시오.”라며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을, 사실 모든 위기를 더 부유한 나라들의 시각으로만 보도하며 ‘이중장부를 만들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신과 일반적인 의료 사안들을 생각해 봅시다. 더 가난한 이들은 그러한 사안들에서 소외될 위험이 있습니다.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가난한 동네에서 치료를 받으려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를 누가 우리에게 알려 주겠습니까? 전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적 경제적 차이로 코로나19 백신의 배급 순서가 정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줄의 가장 맨 끄트머리에 있고, 모든 이에게 원칙적으로 보장된 건강권의 진정한 가치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더 많은 부를 누리는 나라에서조차 급격하게 빈곤에 빠져든 가정들의 사회적 비극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보급품을 받고자 자선 단체 앞에 줄을 서 있는 이들의 소식이 더는 기삿거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온라인의 기회와 그 잠재적 위험


소셜 미디어를 통한 수많은 창구가 있는 인터넷은, 세상을 바라보는 더 많은 시선과 끊임없이 넘쳐나는 시각 자료와 증거로 보도와 공유의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로 우리는 시의적절하게 정보를 직접 얻을 수 있고, 이러한 정보는 때때로 꽤 유용합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뉴스가 가장 먼저 보도되고 또 공식 발표가 가장 먼저 이루어졌던 일부 긴급 상황들을 떠올려 봅시다. 인터넷은 굉장한 영향력을 지닌 도구이기에, 우리는 모두 이용자와 소비자로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전통 매체가 관심 두지 않는 사건에 우리는 잠재적 목격자가 되어 시민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긍정적 뉴스는 물론 더욱 많은 뉴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목격하는 것, 곧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리고, 이를 다른 이들과 공유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잘못된 정보가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퍼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그리고 가끔은 순전히 나르시시즘 때문에 보도 내용과 심지어 시각 자료도 손쉽게 조작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인터넷을 죄악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전하고 듣는 내용을 더욱 신중하게 판단하고 성숙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가 하는 소통에 대한 책임, 우리가 나누는 정보에 대한 책임, 가짜 뉴스를 밝혀내며 통제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의 증인이 되라고, 곧 가서 보고 함께 나누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직접 보는 행위를 대신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그 무엇도 직접 보는 행위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은 직접 체험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어조로도, 몸짓으로도 소통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난 이들을 끌어당기셨던 힘은 당신께서 전하신 진리에서도 비롯되었지만, 그 말씀의 효력은 예수님의 눈길과 자세, 심지어 침묵과도 불가분의 연결고리를 지녔습니다. 제자들은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그분을 지켜보았습니다. 강생하신 말씀(Logos)인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요한이 직접 우리에게 들려준 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고 듣고 만지게 해 주십니다(1요한 1,1-3 참조). 말은 눈에 ‘보일’ 때에만, 체험과 대화로 우리를 이끌어 들일 때에만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와서 보시오.”라는 초대는 과거에도 또 지금도 계속해서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도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공공 생활의 온갖 영역과 상거래에서 공허한 미사여구가 얼마나 많이 넘쳐나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말을 끝도 없이 합니다. …… 그의 논리는 두 포대의 가라지 가운데 숨겨져 있는 두 톨의 밀알과 같아, 발견하려면 온종일 찾아야 할 터인데 막상 찾아봤자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2) 

 이 영국 극작가의 신랄한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통에도 해당됩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이는 “와서 보시오.”라는 초대를 받아들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던 이들의 눈길과 말과 몸짓으로 드러난 ‘크나큰’ 인류애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인간 대 인간, 마음 대 마음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도구가 중요합니다. 타르수스의 바오로라 불렸던 저 위대한 전달자는, 지금이라면 이메일과 소셜 네트워크 메시지를 분명히 이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회중 가운데 있는 그를 보거나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행운을 누렸던 당대의 사람들이 감동받았던 것은 바로 바오로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든 행동하는 바오로를 보면서 사람들은 하느님 은총으로 전해진 구원의 선포가 삶에 얼마나 참되고 유익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하느님의 일꾼을 직접 만날 수 없었던 곳에서도, 그가 파견한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바오로의 삶의 방식을 증언하였습니다(1코린 4,17 참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경에 담긴 예언의 성취를 현실에서 발견하라고 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손에는 책이, 우리 눈앞에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3) 이처럼 복음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삶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의 강렬한 증언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마다 생생히 되살아납니다. 이천 년이 넘도록 거듭되어 온 그러한 만남의 고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모험이 지닌 매력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기다리는 도전은 사람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소통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자신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도록,

진리를 찾아 길을 나서도록 가르쳐 주소서.


가서 보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귀 기울이도록,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성급한 결론에 이르지 않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저희가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가지도록,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피상적인 것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거짓된 겉모습에서 진리를 구별하도록 가르쳐 주소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머무시는 곳을 알아보는 은총과,

본 대로 전할 수 있는 정직함을 저희에게 주소서.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1년 1월 23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전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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