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예로니모 성인의 선종 1600주년 교황 교서
성경에 대한 애정
(Scripturae Sacrae Affectus)
성경에 대한 애정, 곧 기록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생생하고 감미로운 사랑’, 이것이 바로 예로니모 성인이 그의 삶과 노고로 교회에 남긴 유산입니다. 그의 선종 16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성 예로니모 전례 기념일 본기도에 나오는 표현들은1) 교회 역사상 뛰어난 이 인물과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커다란 사랑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해석의 열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생생하고 감미로운 사랑’은, 수많은 물줄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강물처럼, 학자이자 번역가이자 주석가인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 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예로니모의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 성경의 가르침을 알리고자 하는 열정, 성경 본문 해석자로서 지닌 기량,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열렬하고 때로는 거침없는 옹호, 수덕과 엄격한 은수 생활, 관대하고 섬세한 영적 안내자로서 지닌 전문성, 이 모든 것은, 그가 선종한 지 1600년이 지난 뒤에도, 21세기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소개
예로니모 성인은 420년 9월 30일 베들레헴 예수 탄생 동굴 근처에 있는 그가 설립한 공동체에서 선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자신이 성경 안에서 찾고 알게 된 주님께, 아마 375년 사순 시기에 열병에 시달리며 꾼 꿈속에서 이미 마주한 재판관이신 바로 그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였습니다. 이 꿈은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 곧 회개하고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재판관 앞으로 끌려 나간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떠올렸습니다. “나의 상태에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재판관께서는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키케로의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예로니모는 젊은 시절부터 라틴 고전의 명확한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반면에, 그에게 성경의 글들은 처음에는 투박한 비문으로 그의 고상한 문학 취향에는 너무나 거친 것으로 와 닿았습니다.
예로니모는 이러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여, 자신의 번역과 주해를 통하여 거룩한 글들이 다른 이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삶에 새롭고 더욱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이른바 “성경의 몸”(flesh of Scripture)과 사랑에 빠져 하느님 말씀의 종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특징지었던 지식 추구를 통하여, 학문으로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에게 더욱 큰 봉사를 하도록 그 방향을 재설정하여 젊은 시절 공부와 로마에서 받은 교육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로니모 성인은 교부학의 황금기로 알려진 시기에 고대 교회의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서방을 잇는 가교로서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아퀼레이아의 루피누스의 어릴 적 친구였고 암브로시오를 알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동방에서, 그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장님 디디무스,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성화상 전통은, 예로니모 성인을 아우구스티노와 암브로시오와 대 그레고리오와 함께 서방 교회의 네 명의 위대한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의 선임 교황님들께서는 다양한 기회를 빌려 예로니모 성인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셨습니다. 백년 전 예로니모 성인의 선종 1500주년에, 베네딕토 15세께서는 회칙 「위로자 성령」(Spiritus Paraclitus, 1920.9.15.)을 예로니모에게 헌정하고, 그를 “성경 해설의 가장 위대한 학자”(doctor maximus explanandis Scripturis)3)라고 세상에 소개하셨습니다. 더욱 최근에,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두 번의 연이은 교리 교육을 통하여 예로니모와 그의 업적을 소개하셨습니다.4) 예로니모 성인의 선종 16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저도 그를 기리며 성경에 대한 커다란 사랑으로 시작되는 그의 담화와 가르침의 시의적절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예로니모는 확실한 안내자이며 권위 있는 증거자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 말씀에 관한 제12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정기 총회5)와 저의 전임 베네딕토 16세께서 이 성인의 기념일인 2010년 9월 30일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6)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에서 베들레헴으로
예로니모 성인의 삶의 여정은 유럽과 동방 사이에 놓인 로마 제국의 길을 가로질러 이어졌습니다. 예로니모는 345년경에 달마티아와 판노니아, 곧 지금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경계에 있는 스트리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견실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358년에서 364년 사이 어느 날 그는 당시 관습에 따라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그는 로마에서 수사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로마에 머무는 동안 라틴 고전을 탐독하였으며, 당대의 가장 유명한 수사학 교사들 밑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그는 갈리아 지방을 따라 긴 여정에 나섰으며 현재 독일에 있는, 로마 제국의 도시 트리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먼저 아타나시오 성인이 전파한 동방 수도 생활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 체험에 대한 깊고 지속적인 갈망을 품고 아퀼레이아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복된 이들의 성가대”7)라 불리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공동생활의 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374년 즈음에, 그는 수덕 생활을 더욱 철저히 실천하기 위하여 안티오키아를 지나 칼치스 사막에 은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수덕 생활을 통하여 성경 언어 연구에 매진하여 먼저 그리스어를 익힌 다음 히브리어를 익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습니다. 이 유다인은 히브리 말과 그 발음에 대한 지식을 알려 주었는데, 그 발음은 예로니모에게 “거센소리”8)로 여겨졌습니다.
예로니모는 의식적으로 사막과 은수 생활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막과 은수 생활은 가장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자리이자 하느님과 만나고 친교를 맺는 자리로서 그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는 관상과 내적 시험과 영적 투쟁을 통하여 자신의 약점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한계를 더욱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또한 그는 눈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9) 사막에서 그는 하느님의 실질적 현존과 인간과 하느님의 필연적 관계와 그분의 자애로운 위로를 느꼈습니다. 여기서, 저는 출처 미상의 한 일화를 떠올립니다. 예로니모가 주님께 “당신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여쭙자,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나에게 아직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당신께 온갖 것을 다 드렸습니다.” “네가 나에게 주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너의 죄를 다오. 그러면 나는 그 죄들을 다시 한번 용서하며 기뻐할 것이다.”10)
그다음 예로니모는 안티오키아에서 그 도시의 주교 바울리노에게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그 이후 379년경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를 만나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중요한 작품들(오리게네스의 강론집과 에우세비오의 연대기)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38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거행된 공의회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학문의 세월들 안에서 그의 열정과 관대함이 드러났습니다. 복된 조바심(benedicta inquietudo)이 그를 이끌어 그는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때때로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저는 자주 포기하였지만, 그때마다 끈질긴 의지에 힘입어 배움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학문의 “쓰디쓴 씨앗”은 “달콤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11)
382년에 예로니모는 로마로 돌아와 다마소 교황님을 위하여 봉사하였습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소중히 여긴 다마소 교황님께서는 예로니모를 당신의 측근 가운데 한 명으로 삼으셨습니다. 거기서 예로니모는 영적 차원을 잊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아벤티노에서 그는 마르첼라, 바울라, 바울라의 딸 에우스토키움와 같이 철저히 복음적인 삶을 따르고자 하였던 로마 귀족 여인들의 지원을 받아 성경 읽기와 엄격한 성경 공부에 전념하는 다락방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주석가이자 교사이자 영적 안내자로서 활동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복음서들과 아마도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들의 이전 라틴어 번역본에 대한 개정 작업을 착수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오리게네스의 강론집과 성경 주해를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활발한 서간 활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때로는 과도하게 그러나 언제나 참된 신앙과 성경의 유산을 옹호하고자 하는 진심 어린 열망의 촉구에서 이단 저술가들을 공개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강렬하고 풍요로웠던 이 시기는 다마소 교황님의 선종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예로니모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성 생활과 이미 시작된 성경 공부를 지속하고자 열망했던 몇몇 여인들과 친구들과 함께, 그는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그는 위대한 신학자인 맹인 디디모를 만났습니다. 그 후에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386년에 베들레헴에서 영구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성경에 언급된 바로 그 곳에 정착하여 성경 본문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성지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386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팔레스타인에서 살기로 한 그의 결정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에게 주었던 그의 도움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곳인 베들레헴 예수 탄생 동굴 주변에 남녀 ‘쌍둥이’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도 마련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관대함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징표로써 많은 사람이 구원 역사의 장소들을 보고 만지며 문화적 영적 부요를 발견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12)
예로니모는 성경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하느님과 형제자매들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공동체 생활에 대한 매력을 확인하였습니다. 아퀼레이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친구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공동 은수 생활의 이상을 추구하고자 수도 공동체들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수도원은, “스스로를 모든 이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로 여기는” 사람들이 “모든 이들 가운데 첫째가 되고자” 훈련을 받는 ‘수련장’(palaestra)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은 청빈에 만족하며 자신의 생활방식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장상 한 명의 지도 아래에 많은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양성적(formative)이라고 여겼습니다. “진리는 어두운 구석을 좋아하지 않으며 불평하는 이들을 찾지 않는다.”13)는 깨달음 안에서 겸손과 인내와 침묵과 온유를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수도원의 좁은 방을 열망했고” 그리고 “개미들의 열성을, 곧 모두가 함께 일하고 어떠한 것도 개인에게 속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모두에게 속하는 곳을 열망하였습니다.”14)
예로니모는 자신의 학문을 즐거운 여가나 그 자체로 목적이라 여기지 않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어 주는 수단이자 영적 수련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고전 교육은 이제 교회 공동체를 위한 더 큰 봉사를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다마소 교황님께 드린 도움과 아벤티노의 첫 다락방 모임에서부터 특별히 히브리어 공부를 통해 여인들의 지도에 바친 헌신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이 “번역가의 대열에 들어갈 수”15) 있게 하였으며, 그 당시로는 유례없는 일로서, 그들이 원어로 시편을 읽고 노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16)
그의 위대한 학식은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봉사를 하는 데에 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 네포시아노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사제의 말은 성경 독서를 통하여 풍미가 더해져야만 합니다. 저는 당신이 많은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는 열변가나 허풍쟁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교리를 이해하고 하느님의 가르침들을 깊이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장난이나 하며 쉴새없이 떠들어 대면서 비전문가들의 환심을 사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이들의 전형입니다. 어떤 이들은 뻔뻔하게도 종종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며, 타인을 성공적으로 설득한다는 이유만으로 대단한 전문가인 척합니다.”17)
예로니모가 420년 선종 때까지 베들레헴에서 보낸 세월은 성경 연구와 히브리어 원문을 바탕으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기념비적인 작업에 그의 삶을 온전히 바친 가장 풍요롭고 강렬하였던 시기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예언서와 시편과 바오로 서간에 대하여 주해하고 성경 공부에 대한 안내서를 집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에 흘러넘치는 깊은 학식은 사본들의 필사와 분석에서 더 나아가 숙고와 논의에 이르는 협력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거룩한 책들을 연구할 때에, 저는 결코 제 자신의 힘에 의지해 본 적이 없습니다 …… 저는 질문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고, 제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18)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그는, 자신이 “거룩한 문서들을 쓰신 같은 성령 안에서”19) 그 문서들을 번역하는 데에 힘쓸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도와 전구를 청하였습니다. 그는 오리게네스와 같이 주석학에서 필수불가결한 저술가들의 작품을 번역하여, “이러한 자료를 더욱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쉽게 그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20) 하였습니다.
예로니모의 학문 활동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이루어진 사업으로서 우리와 우리 시대에 공동합의성(synodalitas)의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교회의 다양한 문화 기관에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기관은 “협동의 결실이며 더욱 커다란 협력으로 이끄는 지식 없이는 참되고 온전한 인간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지식으로 봉사하는 곳”21)이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친교의 근본은 그저 우리 혼자 힘으로만 읽을 수 없는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 백성에 의하여,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느님 백성과의 이러한 친교 안에서만 우리는 참으로 ‘우리’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진리의 핵심 속으로 파고들 수 있습니다.”22)
하느님 말씀으로 성장한 삶의 좋은 경험들 덕분에 예로니모는 그가 쓴 많은 편지들을 통하여 영적 안내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길동무가 되었습니다. 그는 “스승 없이는 어떠한 기술도 습득할 수 없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루스티쿠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점입니다. 마치 여러 난파에서도 살아남은 한 연로한 뱃사람이 어린 선원을 가르치려 하는 것과 같이, 저는 당신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23) 그는 세상의 평화로운 곳에서부터,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410년 로마 약탈과 같은 사건들로 얼룩진 커다란 격동의 시대에 일어났던 인간사의 흐름에 함께하였습니다.
예로니모는 올바른 신앙을 끊임없이 옹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서한들에서 교리 논쟁을 다뤘습니다. 또한 그의 편지들은 그가 인간관계에 두었던 가치를 보여 줍니다. 예로니모는 타인을 진심으로 염려하였기에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워질 수 있었고, “사랑은 너무나 소중하다.”24)는 것을 체험하였기에 참된 애정을 열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는 그가 자신의 번역과 주해 작품을 우정의 의무(munus amicitiae)로 바쳤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의 작품은 그의 친구들과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이들과 그의 작품이 헌정된 이들에게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들 모두가 비판적 시각이 아닌 벗의 시각으로 자신의 작품을 읽기를 간청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그의 독자와 동시대인들과 미래 세대에게도 선물이 되었습니다.25)
예로니모는 생애 말년을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 관상하며, 저술을 통하여 형제자매들에게 봉사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말씀께서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신 바로 그 베들레헴의 동굴 가까이에서 실천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 깊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분 탄생과 승천의 장소를 품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마음속에 베들레헴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그의 마음에서 탄생하시기 때문입니다!”26)
예로니모의 삶의 ‘지혜적’ 측면
예로니모 성인의 인성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신자로서 그의 삶을 특징지은 두 가지 차원을 통합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모든 인간적 만족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엄격하게 자신을 봉헌했다는 점입니다(1코린 2,2; 필리 3,8.10 참조).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오로지 주님의 신비를 더욱더 온전히 이해하려는 목적에서 열심히 학문에 매진하였다는 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훌륭하게 보여 준 바로 이 이중의 증언은 특히 수도자들을 위한 모범으로 제시됩니다. 금욕과 기도의 삶을 사는 이들이 연구와 성찰의 부단한 노고에 매진하도록 독려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로니모 성인의 이 이중의 증언은 학자들에게도 모범이 됩니다. 모든 인간적 야망과 세속적 욕심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바탕으로 할 때에야 비로소 지식은 종교적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학자들은 늘 명심해야 합니다.
예로니모의 삶의 이 두 측면은 미술사 분야에서도 표현되어 왔습니다. 미술사에는 예로니모 성인이 자주 등장합니다. 서양화 대가들은 흔히 예로니모 성인을 명확히 구분되는 성화상 유형의 두 계보에 따라 묘사했습니다. 한 계보는 예로니모를 주로 수도승과 참회자로 묘사합니다. 광야에서 은둔하며 단식으로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땅에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있고, 많은 경우에 자기 가슴을 치려고 오른손에 돌을 움켜쥐고 있으며 눈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향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 계보에는,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감동적인 걸작이 있습니다. 예로니모를 묘사하는 또 다른 방식은 그가 학자의 겉옷을 입고 장서들과 양피지 문서들에 둘러싸인 채 사상과 저술을 통한 신앙 옹호의 사명을 띠고 책상에 앉아서 성경을 번역하고 주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유명한 예로,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러한 자세의 예로니모의 모습을 여러 번 그렸습니다.
앞서 말한 두 측면은 로마 보르게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에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장면에, 붉은 천을 걸친 늙은 고행자와 지상 실재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책상 위의 두개골이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분명히 학자로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두 눈은 책에 고정되어 있지만 저술가의 전형적인 행동처럼 손에는 펜을 들고 잉크를 적시는 영락없는 학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지혜적 방식이라 부르고자 하는 유비적 방식으로, 우리는 예로니모의 인생 여정에서도 이 두 측면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짜 ‘베들레헴의 사자’처럼 그의 어조는 거칠었지만 언제나 진리에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진리의 종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로니모가 직접 그의 첫 저술, 「첫 은수자 성 바오로의 생애」에서 설명한 대로, 사자들은 ‘힘차게 포효’할 뿐만 아니라 울부짖을 수 있습니다.27) 이러한 까닭에, 예로니모 성인의 모습 안에 나타나는 두 측면은, 사실 성령께서 그가 내면의 일치를 무르익게 해 주시고자 그에게 베풀어 주신 요소들입니다.
성경에 대한 사랑
예로니모 성인의 영성의 독특한 특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경으로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에 있습니다. 모든 교회 학자가 –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교 초기의 교회 학자가 – 그들 가르침의 내용을 분명히 성경에서 길어 올렸다면, 예로니모는 더욱더 체계적이고 어느 모로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성경 주석학자들은 성경의 탁월한 서술적 시적 특성과 그 훌륭한 표현력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로니모는 오히려 성경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겸손한 특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세련된 키케로의 라틴어와 비교되는 투박하고 거의 원시적인 히브리어로 표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예로니모가 성경에 헌신한 것은 심미적인 취향 때문이 아니라, 잘 알려진 대로, 오로지 성경이 그를 그리스도에 대한 앎으로 이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8)
예로니모는 복음서들만 그리고 사도행전과 서간들에 담긴 사도 전승만 연구하고 주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부요함을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 전체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29) 바로 복음서가 이를 입증해 줍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모세와 예언자들과 시편을 통하여 당신 신비를 설명하시는 스승이심을 이야기해 줍니다(루카 4,16-21; 24,27.44-47 참조).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설교도 상징적으로 구약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구약이 없으면 하느님의 아드님, 구세주 메시아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입증하는 광범한 인용집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구약의 ‘예표’에 비추어 볼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하신 그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적 설명에서뿐만 아니라 교리 교육과 설교 안에서, 우리는 구약의 필수불가결한 공헌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은 소중한 양식으로 읽고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에제 3,1-11; 묵시 10,8-11 참조).30)
예로니모의 성경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과 유사하게, 열정적인 표현 방식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바로 그 예언자들에게서 우리의 교회 학자는 격렬하고 폭발적인 말로 표출되는 내면의 불을 길어 올립니다(예레 5,14; 20,9; 23,29; 말라 3,2; 집회 48,1; 마태 3,11; 루카 12,49 참조). 이는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종의 열렬한 열정을 표현하는 데에 필요한 것입니다. 엘리야, 요한 세례자, 바오로 사도와 마찬가지로, 기만과 위선과 거짓 교리에 대한 분노가 예로니모의 연설에 불을 지펴 그의 연설이 선동적이고 신랄한 것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그의 저술들에 담긴 논쟁적 차원은 일종의 가장 참다운 예언 전통을 반영하고 실현하는 것으로 읽으면 더 잘 이해됩니다. 따라서 예로니모는 회개로 이끌고자 모진 질책도 퍼부으며 강직하게 진리를 증언한 모범이 됩니다. 그의 강렬한 어법과 이미지에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만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갈라 1,10 참조)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영적 힘을 다 쏟아 내는 종의 용기가 드러납니다.
성경 연구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 성인의 열정적 사랑은 순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경건한 경청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께 순종하고31), 또한 이어서 계시된 메시지에 대한 살아 있는 해석 전통을 대표하는 교회 인사들에게도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순종”(로마 1,5; 16,26)은 이미 알려진 어떤 것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수용이 아닙니다. 이와 정반대로 믿음의 순종에는 개인의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로니모 성인을 말씀의 충실하고 근면한 종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신앙의 형제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거룩한 ‘유산’을 더 적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했습니다(1티모 6,20; 2티모 1,14 참조).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들이 쓴 것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 자체는 아무런 효과도 없고(마태 13,19 참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샘솟을 수 없습니다.
성경 구절은 언제나 곧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서에 나온 대로, “글을 아는” 이에게도 - 곧 충분한 지적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도 – 거룩한 책은 해석학적으로 닫혀 “봉인된”(이사 29,11)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그 해방의 메시지를 여는 열쇠를 가져다줄 유능한 증인이 개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쇠는 바로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만 홀로 봉인을 풀고 그 책을 여실 수 있고(묵시 5,1-10 참조), 그리하여 은총이 흘러넘치는 이 책의 놀라운 힘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루카 4,17-21 참조). 글을 모른다고(이사 29,12 참조) 공공연히 밝히는 이들이 열심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많습니다. 이는 문맹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언어와 그 표현 방식과 고대 문화 전통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 본문은 알 수 없는 문자로 또한 난해한 언어로 쓰인 것마냥 해독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언적으로 쓰인 내용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봉사직’의 임무를 수행하는 해석자의 중재가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필리포스 부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필리포스 부제는, 수레에 앉아 이사야서의 한 구절(이사 53,7-8)을 읽고 있는 내시를 만나러 갑니다. 그러나 그 내시는 그 의미를 밝혀낼 수 없었습니다. 필리포스가 그에게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내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0-31)32)
예로니모는 우리의 안내인입니다. 필리포스처럼(사도 8,35 참조), 성경을 읽는 모든 이를 예수님의 신비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의 올바르고 유익한 독서를 위하여 필요한 성경 해석과 문화에 대한 정보를 책임감 있게 체계적으로 전하기 때문입니다.33) 하느님 말씀이 전해진 언어들에 대한 능력, 필사본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평가, 자세한 고고학 연구, 그리고 해석의 역사에 대한 지식 등, 예로니모는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나아가고자 그의 시대에 이용할 수 있었던 모든 방법론적 자원을 조화롭고도 현명하게 활용하였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남긴 행적의 이러한 모범적인 차원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 헌장’의 가르침대로, 성경이 “거룩한 신학의 생명”34)과도 같고 그리스도 신앙 실천의 영적 보루와 같다면,35) 성경 해석에는 전문적 역량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할 것입니다.
(로마의 교황청립 성서대학, 예루살렘의 성서학교와 프란치스칸 성서연구소처럼) 많은 탁월한 성경 연구 기관들과 (로마의 아우구스티노 대학처럼) 교부학 연구 기관들이 분명히 이 목적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신학대학도 학생들이 성경 본문의 주해에서나 성서신학의 종합에서나 우수한 해석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성경 수업을 편성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가 성경의 풍요로움을 간과하거나 경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에 대한 핵심 기초 지식이 제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제와 교리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교회 양성 프로그램들 안에서 성경 공부에 더 큰 주안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거룩한 책을 펴고 거기에서 지혜와 희망과 생명의 귀중한 열매들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폭넓게 열린 양성을 증진시켜 나가야 합니다.36)
여기에서 저는 저의 선임 교황님께서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에서 표명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말씀의 성사적 성격은,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과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예로니모 성인은 우리가 성찬례와 하느님의 말씀에 다가갈 때에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저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이 그분의 가르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너희가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요한 6,53)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이 (성찬의) 신비를 뜻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그분의 피는 참으로 성경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가르치심입니다.’”37)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이 – 모세 오경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신명 6,6 참조) - 자녀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그 아름다움과 영적 힘을 온전히 알려 줄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제정하여,38)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 말씀과 더 친숙해질 것을 독려하고자 하였습니다.39) 이로써, 그 밖의 다른 모든 신심 표현은 더 풍요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고, 가치의 위계에 따라 자리하며, 신앙의 정점인 그리스도의 신비와 이루는 완전한 일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불가타
예로니모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학습을 통하여 얻은 “부단한 씨뿌리기의 가장 달콤한 열매”40)는 바로 구약 성경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전부 그리스어로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어로 쓰여 있었지만, 구약 성경은 기원전 2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다 공동체가 작업한 그리스어 완역본인 이른바 『칠십인역』(Septuaginta)만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 독자들에게는, 비록 그리스어 성경에서 라틴어로 옮긴 부분 번역본과 미완성 번역본이 있었지만, 라틴어로 된 성경 완역본이 없었습니다. 성경 전체의 개정과 새로운 번역에 착수하는 공로는 예로니모와 그의 작업을 이어간 이들에게 돌아갑니다. 다마소 교황님의 독려를 받아, 예로니모는 우선 로마에서 복음서와 시편의 개정 작업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구약 성경 전체를 히브리어에서 곧바로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이 작업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이러한 번역 작업을 완수하고자 탄탄한 라틴어 소양뿐 아니라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지식을 잘 활용하였고 특히 오리게네스의 「육중역본」(Hexapla) 등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학 자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최종 본문은 당시 통용되던 양식으로 연속성을 살리는 동시에 히브리어 문체에 더욱 충실하였고, 그러면서도 라틴어의 우아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는 신학 용어의 원형을 이루고 서양 문화사를 특징 짓는 참된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예로니모의 번역은 처음에 맞닥뜨렸던 일부의 거부를 극복하고 이내 학자들에게도 일반 신자들에게도 공동의 유산이 되고, 따라서 ‘불가타’(Vulgata: 이하 『대중 라틴말 성경』)41)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은 예로니모가 번역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성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경은, 그리스도교 문화와 예술이 영감을 이끌어 내는 일종의 ‘거대한 용어집’(폴 클로델)과 ‘성화 책’(마르크 샤갈)이 되었습니다.”42) 문학과 예술은 물론 대중의 언어도 끊임없이 예로니모의 성경에서 영감을 얻으며, 우리에게 미와 신심의 보물들을 남겨 주었습니다.
바로 이 명백한 사실에 따라,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경의 대중 라틴말 역본과 성경 해석 방식에 관한 교령 「한 걸음 더 나아가」(Insuper)로 『대중 라틴말 성경』의 “진정성”을 선언하며, 여러 세기를 거쳐 교회에서 오랫동안 이를 사용해 왔던 데에 경의를 표하고 연구와 설교와 공적 토론의 도구로서의 그 가치를 인정했습니다.43) 그러나 예로니모가 향후 완역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금지시키기는커녕 부단히 상기시켜 주었듯이, 트리엔트 공의회도 원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6세 성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의 위임을 받아들여, 『대중 라틴말 성경』 번역의 개정 작업을 완수하여 온 교회에 봉사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윽고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교황령 「성경의 보고」(Scripturarum Thesaurus)44)를 통하여 ‘노바 불가타’(Nova Vulgata: 『새 대중 라틴말 성경』)라고 불리는 표준판을 반포하였습니다.
토착화로서의 번역
예로니모는 이와 같은 자신의 번역을 통하여 라틴어와 라틴 문화 안에 성경의 ‘토착화’를 이루었고, 이 작업은 교회의 선교 활동을 위한 영속적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 공동체가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께서는 변화를 가져다주는 복음의 힘으로 그 공동체의 문화를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45) 이로써 일종의 순환성이 확립됩니다. 예로니모의 번역이, 그 안에 매우 뚜렷한 자취를 남긴 고전 라틴어와 라틴 문화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처럼, 또한 그 언어와 창의적이고 상징적인 내용으로 새로운 문화 창달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예로니모의 번역 활동은 우리에게, 모든 문화가 지닌 가치들과 긍정적인 형식들이 교회 전체를 위한 풍요로움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저마다 새로운 번역으로 하느님 말씀이 선포되고 이해되며 실천되는 다양한 방식은 성경 그 자체도 풍성하게 해 줍니다. 성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 새로운 음색과 새로운 울림을 수용하면서, 대 그레고리오의 유명한 표현처럼, 읽는 이와 함께 자라기 때문입니다.46) 성경과 복음서는 다양한 문화 안으로 들어가 교회가 더욱더 명백히 ‘패물로 단장한 신부’(이사 61,10 참조)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해 줍니다. 동시에 이는 성경이 모든 문화와 모든 세대의 언어와 사고의 범주 안에서 그리고 우리 시대의 세계화된 세속 문화 안에서 끊임없이 옮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47)
‘언어적’ 환대 행위인 번역과 그 밖의 다른 형태의 환대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강조되어 왔습니다.48) 그러한 까닭에, 번역은 언어만 연관되는 작업이 아니라 참으로 삶에 대한 시각 전체와 연결된 더욱 폭넓은 윤리적 결정에 해당하는 작업입니다. 번역이 없으면 서로 다른 언어 공동체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역사의 문을 닫아건 채 만남의 문화를 건설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릴 것입니다.49) 실제로 번역이 없으면 서로간의 환대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적대감을 부추길 것입니다. 번역가는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언어를 무시하고, 굳센 희망으로 무한한 사랑을 증거하는 번역에 온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많은 경솔한 판단이, 얼마나 많은 단죄와 갈등이 비롯되는지요!
예로니모도 당대를 지배하는 사상에 맞서야만 했습니다. 로마 제국 초기에는 그리스어 지식이 상대적으로 흔했지만, 예로니모 시대에는 이미 드문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로니모는 그리스-그리스도교 문학과 언어에서 최고의 전문가 가운데 한 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연구를 시작하면서 한층 더 험난하고 외로운 여정에 들어섰습니다. “내가 지닌 언어의 한계가 곧 나의 세상의 한계”50)라는 글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예로니모 성인의 여러 언어 지식 덕분에 그리스도교를 더욱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원전들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선종 기념일을 거행하며 우리는 하느님 말씀이 삼천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 특별한 선교 활력에 주목하게 됩니다. 수많은 선교사들 덕분에 우리에게는, 인류의 소통에 토대를 닦아 주고 “모든 이에게 다가가려는 선교 열망”51)의 매개가 되는 문법서, 사전, 그 밖의 언어 교재의 소중한 출판 활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작업을 소중히 여기고 투자하여 소통 불능과 만남 부족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할 일이 많습니다. 단언되어 왔듯이, 번역 없는 이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52) 곧, 번역이 없으면 타인은 물론 우리 자신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로니모와 베드로 좌
예로니모는 언제나 로마시와 각별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예로니모에게 로마는 끊임없이 돌아갈 영적 피난처였고, 그가 인도주의자로 길러지고 그리스도인으로 양성된 장소였습니다. 예로니모는 로마인(homo Romanus)인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는 그가 스승으로서 가르치면서 사랑해 마지아니하던, 로마시의 언어인 라틴어를 통해서도 매우 각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무엇보다도 로마 교회와 특히 베드로 좌와의 결속이었습니다. 성화상 전통에서는 시대착오적으로, 다마소 교황 곁의 로마 사제단에 속한다는 표지인 추기경의 붉은색 복장을 한 예로니모를 묘사해 왔습니다. 예로니모가 개정 번역을 시작한 곳도 바로 로마였습니다. 질투와 몰이해로 어쩔 수 없이 로마시를 떠나야 했을 때조차 그는 늘 베드로 좌와 굳건히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예로니모에게 로마 교회는 그리스도의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옥한 땅입니다.53) 그리스도인의 잦은 분열 때문에 솔기 없이 통으로 짠 교회의 옷이 찢기는 시련의 때에 예로니모는 베드로 좌를 확실한 준거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따르지 않는 저는 베드로 좌와 일치를 이루어 결속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예로니모는 다마소 교황님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에게 모이지 않는 자는 분열시키는 자이고,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자는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자입니다.”54) 따라서 예로니모는 이렇게도 단언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좌와 일치를 이루는 이가 제 사람입니다.”55)
예로니모는 신앙 때문에 치열한 논쟁에 자주 휩싸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진리를 향한 사랑과 열렬한 그리스도 옹호 때문에 자신의 서한과 저술에 지나친 폭언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평화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저 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 참평화, 앙심을 품지 않는 평화, 전쟁이 없는 평화, 적대자들을 쓰러뜨리는 평화가 아니라 우리를 벗으로 하나 되게 하는 평화를 의미합니다!”56)
현대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더 친교와 자비의 영약을 필요로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매력적이고 빛나는 형제적 친교의 증거를 우리가 보여 줍시다.57)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열렬한 기도로써 바로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예로니모가 사랑했던 것을 사랑하기
이 교서를 마치며 저는 모든 이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에게 후대가 바친 수많은 찬사 중에는, 성인이 그저 성경의 보화로부터 시작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교에 자양분을 공급해 온 ‘도서관’의 가장 위대한 학자 가운데 한 명, 그 이상이라는 찬사가 있습니다. 예로니모가 네포시아노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이 바로 그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읽고 꾸준히 묵상함으로써 그는 자기 마음을 그리스도의 도서관이 되게 하였습니다.”58) 예로니모는 아낌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고유한 도서관을 넓혀 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도서관을 신앙의 이해와 영성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연구실로 여겼고, 바로 그 안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놀라운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예로니모에게 연구는 젊은 시절의 양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의무가, 일생토록 날마다 수행할 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그가 스스로 도서관이 되어 수많은 타인에게 지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 운동을 탐구하고자 4세기에 동방을 여행한 포스투미아누스는 예로니모와 몇 달간 함께 지내며 그의 생활 양식을 목격하고서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온통 독서에, 온통 책에 파묻혀 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쉬지 않습니다. 늘 무엇인가를 읽고 쓰고 있습니다.”59)
이와 관련하여, 저는 종종 오늘날 한 젊은이가 시내 서점에 들어가거나 인터넷 사이트 안에서 종교 서적 코너를 찾으면서 할 수 있는 경험에 관하여 생각해 봅니다. 혹여 종교 서적 코너가 있더라도 대부분 구석에 있을 뿐만 아니라 양서들이 부족합니다. 한 젊은이가 이들 서점의 서가나 인터넷 웹페이지를 둘러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종교적 탐구가 어떻게 생각과 마음을 일치시켜 주는 열정적인 모험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에 걸쳐 위대한 사상들에 불을 지폈을까? 영성 생활의 성장이 신학자와 철학자, 예술가와 시인, 역사가와 과학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오늘날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배움의 부족입니다. 이는 비단 종교안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우리 문화 전통의 믿음직한 통역자와 번역자가 되게 해 주는 해석 능력이 부족해진 것입니다. 저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한 가지 도전 과제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유산에 대한 탐구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리스도교는 여러분을 여러분이 소유해야 마땅한 탁월한 문화유산의 상속자로 만들어 줍니다. 이 역사에 열정을 가지십시오. 이 역사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상인처럼 “값진 진주”(마태 13,46)를 사고자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한, 조바심 내는 청년 예로니모에게 담대히 시선을 집중하십시오.
참으로 예로니모는 “그리스도의 도서관”입니다. 1600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분 말씀을 만나는 일과 분리될 수 없는 그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영원한 도서관입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이 기념일은 예로니모가 사랑했던 것을 사랑하고 그의 저술들을 재발견하며 그의 영성으로 감동받으라는 부름입니다. 그 영성은 본질상, 계시의 하느님을 가장 잘 알고자 조바심 내는 열렬한 바람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자주 읽으십시오. 그대의 손에서 거룩한 책을 절대 내려놓지 마십시오.”60) 예로니모가 동시대인들에게 끊임없이 주었던 이러한 권고에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로니모가 상기시켜 주었듯이, 동정 마리아께서는 무엇보다도 당신의 동정 모성으로 빛나는 모범이시면서 또한 기도 안에서 성경을 읽으신 행동으로도 빛나는 모범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마음속으로 되새기셨습니다(루카 2,19.51 참조). 마리아께서는 “거룩한 분이셨고, 성경을 읽으셨으며, 예언자들을 아셨고, 가브리엘 천사가 당신에게 예고한 것과 예언자들이 예언해 왔던 것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들로, 당신 외아들로 태어난, 구유에 누워 우는 갓난아기를 보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마리아께서 보신 그분, 구유 안에 누워 계신 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이 본 것을, 읽고 들어 왔던 것에 견주어 보셨습니다.”61) 성모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립시다. 성모님께서는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우리 삶에 끊임없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관상하는 법을 누구보다도 잘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재위 제8년
2020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기념일
프란치스코
1) “하느님, 복된 예로니모 사제에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맛들이게 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본기도, 2002(제3판), 바티칸 시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7(제3판), 992면.
2) 성 예로니모, 「서간집」(Epistulae), 22,30, 『라틴 교회 저술가 전집』(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CSEL) 54,190.
3) 베네딕토 15세, 회칙 「위로자 성령」(Spiritus Paraclitus), 1920.9.15.,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12(1920), 385-423면.
4) 베네딕토 16세, 수요 일반 알현 교리 교육, 2007.11.7.; 2007.11.14., 『베네딕토 16세의 가르침』(Insegnamenti), III, 2(2007), 553-556, 586-591면 참조.
5)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제12차 정기 총회, 하느님 백성에게 보내는 메시지, 2008.10.24.
6)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2010.9.3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1판), AAS 102(2010), 681-787면 참조.
7)「연대기」(Chronicum) 374, 『라틴 교부 총서』(Patrologia Latina: PL) 27, 697-698면.
8)「서간집」, 125,12.
9) 「서간집」, 122,3 참조.
10) 프란치스코, 성녀 마르타의 집 경당 아침 묵상, 2015.12.10. 이 일화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A. Louf, Sotto la guida dello Spirito, Qiqaion, Mangano (BL), 1990, 154-155면.
11)「서간집」, 125,12 참조.
12)「주님의 말씀」, 89항 참조.
13)「서간집」, 125,9.15.19 참조.
14) 성 예로니모, 「수인 말쿠스 수도승의 생애」(Vita Malchi Monachi Captivi), 7,3, PL 23,59-60.
15) 성 예로니모, 「에스테르기 주해」(In Librum Esther), 서문, 2, PL 28,1505.
16)「서간집」, 108,26 참조.
17)「서간집」, 52,8; 참조: 「주님의 말씀」, 60항.
18) 성 예로니모, 「칠십인역 역대기 주해」(In Librum Paralipomenon LXX), 서문, 1.10-15, 『그리스도교 원전』(Sources Chrétiennes: SC), 592,340.
19) 성 예로니모, 「모세 오경 주해」(In Pentateuchum), 서문, PL 28,184.
20)「서간집」, 80,3.
21) 프란치스코, 교황청 학술원들의 제24차 공식 회의를 맞이하여 보낸 메시지, 2019.12.4.,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2019.12.6., 8면.
22)「주님의 말씀」, 30항.
23)「서간집」, 125,15.2.
24) 「서간집」, 3,6.
25) 성 예로니모, 「여호수아기 주해」(In Librum Iosue), 서문, 1, 9-12, SC 592,316 참조.
26) 성 예로니모, 「시편 강론」(Homilia in Psalmum), 95, PL 26,1181.
27) 성 예로니모, 「첫 은수자 성 바오로의 생애」(Vita S. Pauli Primi Eremitae), 16,2, PL 23,28 참조.
28) 성 예로니모, 「이사야서 주해」(In Isaiam), 서문, PL 24,17 참조.
2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1965.11.18., 14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제3판), 177면 참조.
30) 계시 헌장 14항 참조.
31) 계시 헌장 7항 참조.
32) 「서간집」, 53,5 참조.
33) 계시 헌장 12항 참조.
34) 계시 헌장 24항.
35) 계시 헌장 25항 참조.
36) 계시 헌장 21항 참조.
37)「주님의 말씀」, 56항; 성 예로니모, 「시편 주해」(In Psalmum), 147, CCL 78, 337-338.
38) 프란치스코, 자의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 2019.9.30.,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61호(202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8면 참조.
39)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제2판), 152.175항, AAS 105(2013), 1083-1084.1093면 참조.
40) 「서간집」, 52,3.
41) 「주님의 말씀」, 72항 참조.
42) 성 요한 바오로 2세, 예술가들에게 보낸 서한, 1999.4.4., 5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2호(199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1면, AAS 91(1999), 1159-1160면.
43) 하인리히 덴칭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헬무트 호핑 공편, 페터 휘너만 편집, 2014년(제44판), 1506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7년(제1판), 427면 참조.
44)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령 「성경의 보고」(Scripturarum Thesaurus), 1979.4.25., AAS 71(1979), 557-559면.
45)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16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제2판), AAS 105(2013), 1068면.
46) 성 대 그레고리오, 「에제키엘서 강론」(Homiliae in Ezechielem), I, 7, PL 76, 843D 참조.
47)「복음의 기쁨」, 116항 참조.
48) P. Ricoeur, Sur la Traduction, Bayard, 파리, 2004 참조.
49) 「복음의 기쁨」, 24항 참조.
50) L.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5.6.
51) 「복음의 기쁨」, 31항.
52) G. Steiner, After Babel. Aspects of Language and Translation, New York, 1975 참조.
53)「서간집」, 15,1 참조.
54)「서간집」, 15,2.
55)「서간집」, 16,2.
56)「서간집」, 82,2.
57) 「복음의 기쁨」, 99항 참조.
58)「서간집」, 60,10.
59) 술피키우스 세베루스, 「대화」(Dialogus), I,9, SC, 510, 136-138.
60) 「서간집」, 52,7.
61) 성 예로니모, 「주님의 탄생에 관한 강해」(Homilia de Nativitate Domini) IV, PL Suppl. 2, 191.
<원문 Apostolic Letter of the Holy Father Francis, Scripturae Sacrae Affectus on the Sixteen Hundred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Saint Jerome, 2020.9.30., 영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apost_letters/documents/papa-francesco-lettera-ap_20200930_scripturae-sacrae-affectus.html
이탈리아어: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apost_letters/documents/papa-francesco-lettera-ap_20200930_scripturae-sacrae-affectu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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