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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제20회 가정 성화 주간 담화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0-12-23 조회수 : 2603

2020년 제20회 가정 성화 주간 담화


코로나 시대의 그리스도인 가정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은 20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자렛 성가정을 향합니다. 가정의 위기 시대에 나자렛 성가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나자렛 성가정이 모든 가정이 닮아야 할 이상적인 가정 상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과는 달리 수많은 우여곡절과 위기의 순간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복음사가들은 나자렛 성가정의 어두운 모습을 감추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들이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여 줍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마리아의 임신으로 파혼 직전까지 이르지만, 요셉은 천사를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일을 굳게 믿고 위기를 이겨 냅니다(마태 1,18-25 참조). 헤로데의 학살 소식에 고향을 떠나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고 시련을 이겨 냅니다. 길거리에서 잃어버린 소년 예수님을 며칠을 찾아 헤매는 일을 겪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나자렛 성가정이 겪은 삶의 굴곡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가정은 위기의 순간에 철저히 하느님 뜻에 충실합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일에 직면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루카 2,19). 그리고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이 오늘날 우리 가정에 빛이 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도전에 용감하고 침착하게 맞섰기 때문입니다(「사랑의 기쁨」, 30항 참조). 그리스도인 가정은 가정을 통하여 당신의 위대한 일을 지속하시는 하느님을 증언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성가정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우리는 가정이 겪는 온갖 시련과 위기 속에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 마음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끝까지 순종하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믿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 섭리의 물결 안으로 끌어들이고, 하느님 섭리를 이 땅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돕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로 미사와 모임이 위축된 상황에서 우리는 ‘가정 교회’ 곧 가정의 교회성(敎會性)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지금 가정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라는 메시지를 읽도록 초대받습니다(교회 헌장 11항; 「가정 교서」, 3항; 「사랑의 기쁨」, 15.86-88항 참조). 초대 교회 공동체는 가정을 중심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하였습니다(로마 16,5; 1코린 16,19; 콜로 4,15; 필레 1,2 참조).
구원의 역사에서 가정은 늘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가정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이 꽃피는 자리입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이야말로 모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치료제입니다.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 고통을 나누는 사랑,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사랑,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용서하는 사랑은 가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가정 교회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 곧 보편 교회 안의 작은 교회입니다. 가정 교회는 교회를 일상에서 구현합니다”(발터 카스퍼, 『가정에 관한 복음』, 51면).

 

  그리스도인 가정은 세례받은 신자 각자에게 부여된 삼중 직무인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이 구현되는 교회적 실재입니다. 가정은 말씀이 선포되고 성찬례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입니다(「사랑의 기쁨」, 15항 참조).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정은 그리스도 신앙과 생활의 전수가 이루어지는 교리 교육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교회를 필요로 하며, 교회 또한 가정을 필요로 합니다”(『가정에 관한 복음』, 54면).

 

  오늘날 신앙 위기의 중심에는 가정의 위기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직면한 신앙의 위기와 신앙 전수의 위기는 가정 교회를 회복하라는 절실한 호소로 들립니다. 사실 보편 교회가 살고 증언해 온 ‘가정 교회’ 전통은 한국 교회에서 아름답게 꽃피웠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지내며 한국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다시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오랜 박해 동안 가정은 말씀이 선포되고 전례가 거행되며 신앙의 전수가 이루어진 곳이었습니다. 또한 사제와 수도 성소의 요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 교회의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의 절박한 요청입니다.

 

  감염병으로 말미암은 비대면의 상황은 그동안 도외시해 오던 가정에 주목하게 하였습니다. 일과 개인사에 몰두한 나머지 감추어 두었던 가정의 고통과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남으로써 가족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가정이 위기에 놓였다기보다는 이미 있던 위기를 더 분명히 보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성가정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주어진 사명은 매우 중대합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던 예수님처럼, 항상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했던 성모님처럼, 이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도록 합시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와 인내를 청합시다. 모든 것을 선하게 이끄시는 하느님께 의탁하며 가정의 거룩한 사명을 실천합시다.


2020년 12월 27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정과 생명 위원회
위원장 이 성 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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