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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과 보편적 형제애 코로나19 사태 관련 성명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0-04-17 조회수 : 4334

교황청 생명학술원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과 보편적 형제애

코로나19 사태 관련 성명 



   온 인류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우리는 전례 없이 중대한 전 지구적 어려움에 처했으며, 우리 일상의 계획들을 뒤흔드는 그 위력은 날마다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확산되는 위협은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삶의 방식에 의문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상상도 못 한 역설에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즉 전염병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는 서로 거리를 두고 격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격리되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곧 깨달을 것입니다.
 
   과학기술과 관리경영에 한껏 도취한 우리는 이 전염병의 확산에 대비한 사회적, 기술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그 영향을 인식하고 인정하기 어려웠고, 이제 전염병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되는 실제 위협을 들여다보면, 이 상황에 맞닥뜨려, 어떤 저항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육체적, 문화적, 정치적 취약성에 대한 인식에서도 여전히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위협은 과학적, 기술적 치료방법의 범위를 넘어서 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책임을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며 불공평한 일일 것입니다. 동시에 인본주의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책임 있는 성찰에서 오는 조언과 더 깊은 통찰이 의약품과 백신 연구와 마찬가지로 긴급한 상황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심각한 현 상황과 책임감을 직시하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애로 결속과 일치, 협력과 형제애의 장을 만듭니다. 또한 과학 분야와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기여를 북돋아 그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역할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모두 마땅히 진심 어린 감사를 빚진 그분들의 헌신은 이 위기를 지나면서 더욱 확고하게 진가를 인정받을 것입니다.


   현 상황에서, 최상의 가능한 인도주의를 추구하면서 과학과 윤리 사이의 협력을 장려하고 지원을 위임받은 교황청 생명학술원은 우리가 성찰한 바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는 인간을 위한 사회적 관계와 배려를 증진해야 할 새로워진 정신 안에서 이 상황의 정확한 요인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공동체의 형제애가 도전을 받고 있는 이례적인 상황은, 이 새로워진 인도주의의 정신이 각 개인 안에서 그리고 국가 간의 조화로운 유대 안에서 정연한 속도로 제도적 문화에 영향을 주기 위한 기회로 바뀌어야 합니다.


취약함과 한계 안에서의 결속


   먼저, 지금의 전 세계적 감염병 유행은 인류에게 급격히 닥쳐온 불안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어떤 곳에선 개인과 공동체가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입니다. 전 세계 어디서나 부족함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돌봄 서비스나 음식을 가난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불안정한 지역의 숫자가 꾸준히 줄어들어 이제 인간은 더 이상 나약한 존재가 아니며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기술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 여하에 관계 없이 이미 유행 중인 전 세계적 감염병을 통제하는 것은 큰 경제 규모와 발전된 기술력, 실력 있는 연구소와 보건 의료 설비를 갖춘 나라에서조차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과학과 기술력에 대한 우리의 낙관적 예측을 토대로 이 정도 규모의 세계적 전염병 확산은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발전된 사회는 훌륭한 보호 및 돌봄 자원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경계하지 않았던 각종 시스템의 취약성 또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운명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학은 늘 한계에 부딪힙니다. 우리는 이미 과학적 결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학은 편의 또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특정 부분에 집중한 나머지 그 외의 것들은 배제하는 데다가 과학적 이론이란 늘 임시적이고 수정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불확실성을 경험하며 우리는 점진성 및 복잡성 또한 까다로운 방법론 및 입증을 요구하는 과학적 지식의 일부라는 것을 다시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전 세계 사람들이 불안전성과 우리 지식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 사람들이나 단체가 스스로를 자주적이고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며 편할 때 스스로를 격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하기에 충분히 가까워져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효율적인 도구를 가졌을 때 보다 취약해진 상태에서 더욱 상호 연결됩니다. 전염병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매우 빠르게 퍼지고 한 개인에게 일어난 일은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에 새겨 두지 않은 부분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좋든 싫든 우리 행위의 결과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행동은 반드시 사회적 결과를 불러옵니다. 이는 각 개인, 공동체 및 지역사회에 모두 적용됩니다. 무분별하고 어리석은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처럼 보이나 지금과 같이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는 행위자 본인에겐 영향이 없을지라도 다른 모든 이들에게 위협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떻게 각자의 안전이 모두의 안전과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염병의 창궐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닥친 위협은 숨겨지지도 않을뿐더러 지금 우리의 삶의 방식 곳곳에 침투해 각종 보호 조치들을 교묘히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발전/개발 모델이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교통 및 운송 네트워크를 토대로 인간의 면역 체계에 아직 생소한 미생물들이 발견되는 신성한 숲을 망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아마 우리는 현 위기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러한 형태의 위협이 장기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 문제를 우리가 가진 가장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자원을 활용하되 구원과 보건 (의료)을 동일시하는 사회 모델에 대한 이념적 강조 없이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동시에 그것이 가진 한계를 겸손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질병과 죽음은 과학과 기술의 패배이기보다는 우리의 가장 크고 깊은 사랑에 대한 큰 상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의 진실된 사랑을 포기하거나 정서적 유대를 깨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을 미처 다 실천하지 못할 때에도 그 애정과 유대감은 언제나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지만 생명이 살아 숨쉬는 사랑의 신비함은 영원할 것이라 희망합니다.


단순한 상호 연결에서 선택한 결속으로
 
   우리는 이러한 끔찍한 비상사태를 겪는 지금처럼 우리 삶의 기초가 되는 상호관계에 대해 깊이 인식하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모든 삶이 공동의 삶이며, 우리는 함께 삶을 이루고,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생물학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공동체의 자원은 돌봄에 필요한 모든 활동을 수반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생물학적 생명을 보호하려는 바로 그 필요성 때문에 지금 같은 시기에 중요한 가치인 이 자산을 생각 없이 낭비해 왔는지도 모르며, 정서적 유대와 공동체 정신이 엄청난 시련을 겪을 때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관계의 재화를 심각하게 저평가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유와 권리에 대해 말할 때, 흔히 기준점이 되는 두 가지 적절치 않은 사고방식이 오늘날 대두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자유는 상대방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라는 것입니다. 이미 위험하다고 판명된 이 모호한 사고방식은 (자유라는) 경험을 잘 이해하기에는 부적절하며, 실제 힘 있는 자들에 의해 단언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는 좋든 싫든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겹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세계적인 전염병의 확산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으로부터의 ‘감염’의 위협을 인지하기 위해, 자신을 해로움에서 보호하기 위해 거리두기를 하는 공동선을 위한 협력에서 드러내기를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 인생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다.”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일부이며  인류는 우리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이 의존관계를 받아들이고, 인류 안에서 우리를 참여자와 주인공으로 만드는 책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결과에 상응하는 의무 없이 권리는 없습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공존은 엄밀히 윤리적인 문제이지 법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깊이 깨닫기를 요청받고 있습니다. 인류의 공존을 위해 서로 돌보는 관계가 지금처럼 근본적인 인식으로 제시된 적은 없었습니다. 단순한 관계에서 결속을 선택한 상호의존으로의 변화는 자연적인 전환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책임 있는 행동과 형제적 태도를 향해 나아가는 변화의 다양한 징후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때로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나 건강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낌없이 모든 힘을 쏟아붓는 의료진의 헌신에서 극명하게 봅니다. 이들의 직업정신은 계약상 의무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그 일이 단순히 돈과 맞바꾸는 ‘업무’나 ‘거래’ 아니라, 그 무엇보다 표현, 의미 및 가치의 영역이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연구자와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향력과 정보를 공유하려는 의지는 의약품의 안전성과 효능을 확립하기 위한 실험 기록에 관한 연구소 네트워크 간의 신속한 협력체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형제애를 지키고 증진하기 위해 매일매일 단호하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모든 여성과 남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가정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이며 노인과 젊은이들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봉사를 멈추지 않는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그들입니다. 코로나19로 죽은 많은 사제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희생을 치르면서도 계속 섬기는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그들입니다.
 
   정치적으로 현 상황은 우리에게 넓은 시각을 갖도록 촉구합니다. 국제 관계에서 (그리고 유럽연합 회원국 간의 관계에서) ‘국가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은 근시안적이고 허황된 논리입니다. 여전히 정치적이고 상업적이며 이념적이고 상관적인 저항에 단호한 자세를 취하는 효과적인 협력과 실제적인 조율이 없으면 바이러스는 멈추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결정입니다. 우리는 개개인의 즉각적인 욕구를 항상 충족시키지 못할지라도 열린 비전과 선택이 필요합니다. 현저한 세계적 유행의 역동적 추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효과적이려면 자국의 국경 내에서만 일어나는 일로 국한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 의학, 정치의 사회적 연결이 시험대에 오르다


   정치적 결정은 과학적 자료를 참작해야 할 것이지만 그런 요인들로 제한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처한 여러 현상을 실험 관찰에 의한 과학의 범주만을 근거로 판단한다면 기술적 차원의 답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진행을 정치적 선택에 따라 결정하는 논리로 끝날 것입니다. 이는 생명정치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위험한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여러 문화 사이의 다름을 존중하지 않고 단 한 가지 기술적-과학적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으로, 건강, 질병, 죽음, 건강관리시스템이 내포한 서로 다른 점들을 대단히 많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과학과 인도주의 사이가 벌어지거나 심하게는 반목하지 않고 통합하는 협력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 확산과 같은 비상사태는 무엇보다도 결속이라는 항체로 극복해야 합니다. 기술적이고 임상적인 억제책은 공동선을 위해 광범위한 심층연구로 통합되어야 하며, 시민권, 소득, 정치 견해, 나이 등에 따라 특권층 사람들에게 직접 이익을 준다거나 취약계층을 도외시하려는 의도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임상실험과 더 긴밀하게 연관된 사람들도 포함해서 ‘의료정책’에 따르는 모든 선택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비상 상태에 처한 많은 국가는, 모든 사람을 동시에 치료할 수 없는 한정된 자원의 선별배당을 고려하면서 의료진을 중대하고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경우 기관 차원에서 일을 처리한 다음에는 모든 것을 배당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이때는 그 결정이 평등하고 고귀한 모든 사람의 품위와 인간 삶의 가치에 차별을 둘 수 없다는 점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결정은 환자의 상태, 즉 얼마나 위중하며 치료가 어느 정도 필요한지, 환자의 예후에 따라 치료방법이 임상적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평가에 따른 최상의 가능한 치료방법 사용이 중요합니다. 선택을 결정하는 유일하고 자동적인 기준으로 나이를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나이 많은 사람과 매우 병약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됩니다. 재난의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어떤 경우에도 가능한 한 충분하고 철저한 논의에 근거한 정확한 기준과, 위급한 상황일지라도 독단적이거나 즉흥적인 결정을 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되풀이될 수도 있지만 선별배당은 최후의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가능한 정도의 대체 치료법을 찾고, 자원을 분배하고, 환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은 정의의 틀 안에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대안입니다. 역경 아래에서 창의력은, 다수의 환자를 위해 같은 환기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에 준비된 해결책을 갖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아픈 사람을 단념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의 치료가 소용이 없을 때조차 통증처치와 곁에 있어 주는 일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지금보다 덜 힘든 미래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공중위생 면에서도 우리는 지금 중대한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예방법과 치료법 사이의 균형, 개인과 집단 차원의 치료에서의 균형의 문제(위생과 개인의 권리 그리고 공중위생 사이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감안한)가 그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치료약을 찾아낼 수 있다는 목표를 신중하게 고려한 문제로, 환경을 위한 교육과 관심과 같이 사회 전반의 생활에서 위생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세계 생명윤리학의 견해가 맺은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험에 처한 다수의 이익을 고려하고, 인간의 삶과 건강, 돌봄의 쟁점을 축소하는 개인주의적 시각보다 더 중요한 전 세계에 걸친 문제들을 다룹니다.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의 위협은 책임감의 맥락에서 의료체계의 국제적 협력을 도입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협력 과정의 강도는 진단 속도, 신속한 대응, 적절한 억제 기준, 충분한 조직체계, 기록 보관 장치, 정보와 데이터의 공유 능력이라는 가장 약한 연결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긴급한 상황 전반을 다루고, 결정을 내리며, 정보를 통제하는 당국은 쏟아져 나오는 정보로 인한 ‘인포데미아’를 방지하기 위해 정확한 데이터와 단편적 보고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 시험에 든 복음의 믿음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특히 노인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같은 조건에서도 가용 자원, 의료 제도의 질적인 내용과 구조, 주민들의 생활 환경, 질병의 특성을 알고 이해하는 능력과 정보 해석 능력 등에 따라 여러 감염 국가와 각 국가 안에서 전염병의 치사율은 차이가 납니다. 일상생활에서 아주 기본적인 건강 관리가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는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직면한 대단히 비관적인 상황에 대한 생각은 우리에게 이 역사적 위기에서 하느님의 활동에 대해 매우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 이야기할 것을 권고합니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불경죄’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신성한 응보’라는 대응관계를 만든 미성숙한 방식으로 지금 인류가 겪는 고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분께서 가장 많이 돌보시고 그분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신(마태 25,40~45) 바로 그 가장 약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은 그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성경 말씀과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이 실현된 것에 귀 기울이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위한 인류애를 몸짓으로 드러냄으로써 우리 삶이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런 몸짓은 지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배려하는 마음과 자비를 표현하는 모습은 그 하나 하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이 위기 앞에서 우리는 가장 약한 사람들, 난민과 이민자들 또는 분쟁, 전쟁, 굶주림으로 지속적인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겪는 또다른 재난을 잊을 수 없습니다.
 

중재를 청하는 기도
 
   복음 말씀이 다가가는 곳에서 물리적 한계나 적의를 품은 세력을 만났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만드신 중재의 기도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멈출 수 없는 확고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Es 32,9~13) 믿는 이들이 중재를 청하는 이 부르짖음은, 오늘 우리 모두가 겪는 죽음과 두려움의 비통한 신비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인간 존재를 위대한 여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우리 존재의 외피는 해방을 기다리는 나비의 유충과 같습니다. 창조물은 모두 “분만의 고통”을 살고 있다고 베드로 성인은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고통 중에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표현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와 일치하도록 하신 모든 이,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중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사람을 신뢰하도록 하는 원천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책임을 실천하는 내면의 힘을 얻고,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며, 어떤 현실에 의해 이 세상에서 인류의 공존이 가능한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전염자가 많은 도시인 베르가모의 프란치스코 베스치 주교의 말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술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믿음이 우리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기도는, 살도록 부름받은 특히 이 재앙을 저지하고 극복하도록 부름받은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헌신을 실천할 내면의 힘을 줍니다.” 
 
   이런 믿음을 고백하지 않는 누군가도 가장 좋은 인간 조건을 가리키는 이 보편적 형제애의 성찰에서 증언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인류애는 흔들림 없는 공동선으로서의 삶을 위해 인간 사랑과 수고와 함께 모든 것에 감사하고 하느님을 경외하게 되는 현장을 떠나지 않습니다.


2020년 4월 8일 수원교구 번역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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