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든에 40대 아들 뒷바라지…… 노인 빈곤 부르는 청년 빈곤”, 요즘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자화상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어떤 기사 제목입니다. 노인 빈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취업 실패로 부모 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년과 그들의 빈곤이 다시 부모 세대의 빈곤을 가속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인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이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라는 사실이 믿기십니까? 오늘 자선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자선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요한 사도의 이 말씀을 2017년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의 첫 구절로 삼으셨습니다. 평소 교황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57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의 이 말씀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비록 그들은 되갚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를 갚아 주실 것이며, 이렇게 우리는 참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을 주로 구제의 측면에서 생각해 왔습니다. 교회는 그들이 가난해진 원인과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보다 응급 구호만을 제공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황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요청하십니다. 그들을 가난하게 만든 사회 병폐(구조적 악)의 근본 뿌리를 해결하는 데까지 다가가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02항 참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시장의 신격화와 절대화를 가져오면서 사회적 배척, 또는 사회적 불평등, 소득 불균형을 초래하여 가난한 이들을 양산하였습니다(「복음의 기쁨」, 56항 참조). 우리가 이러한 구조적 원인에 맞서 싸움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문제들, 또는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자선의 첫걸음은 ‘공감’ 그리고 ‘함께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아니 더욱 보잘것없는, 마치 죄인과 같은 처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우리를 당신의 진정한 형제요 자매라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하느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정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듯이, 우리도 “가장 작은 이들”을 내 형제자매로 여기고 그들과 함께해야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올해 7월 제주교구에 난민 돕기 성금을 전달하시면서 “우리가 부닥친 새로운 사회적 지리적 현실 앞에서 모든 가톨릭 신자가 좀 더 너그럽게 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저들을 환대하자.”고 당부하셨습니다.
자선은 단순한 도움을 뛰어넘어 구체적 삶의 모습으로 사랑의 육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지난해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교회가 발표한 사목 제안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밖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을 만나고, 그들이 우리 공동체 안으로 동행하여 들어오도록 초대’합시다. ‘가난한 이들이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에 더욱 잘 참여하도록 유용한 도구를 제공’합시다. 이렇게 자선을 실천하여 복음을 육화합시다!
2018년 12월 16일, 자선 주일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유경촌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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