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인권 주일, 제8회 사회 교리 주간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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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여러분, 한국 천주교회는 해마다 대림 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강생과 함께 도래한 ‘종말의 시간’을 살며 깨어 지내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되새기며 인권 현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보는 일은, 다가온 성탄을 준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지금 우리는 인권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찰하고 발언하기에 과거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를 막론하고 여러 추문으로 하느님 백성이 겪는 고통과 곤혹스러움이 깊고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세상을 향해 인권을 이야기하면 자칫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라는 비아냥을 듣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자기도 상처입고 고통받는 이가 더 깊고 근원적으로 치유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처입은 치유자”란 헨리 나웬 신부님의 표현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오랜 사회 교리 전통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범을 따라, 올해 인권 주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권 현실에 관해 신앙의 지성으로 성찰하고 정직하게 발언하며 구체적인 실천을 도모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여성, 장애우, 성소수자, 이주민, 비정규직이나 청년 노동자, 노인, 아동, 국가 폭력 피해자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아직도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인권 사각지대가 널려 있습니다만, 작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겹겹의 차별을 받고 있는 농어촌 이주 노동자에게 최우선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노동사목소위원회, 그리고 국내이주사목위원회를 통한 1년의 조사 연구 끝에 올해 ‘농어촌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 안내문’을 만들어 각 교구에 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인권 주일에는, 주로 농어촌 이주 노동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이 짧은 성찰과 권고가, 이른바 ‘미투’ 운동과 관련하여 올해 심각하게 불거진 여성 인권 문제를 비롯한 여러 인권 영역을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근원적인 관점에서 어느 정도 두루 아우를 수 있었으면 합니다.
2. 인권 감수성의 토대는 타자의 ‘다름’이 초래하는 불편함을 감당하고 소화하는 능력, 곧 상대의 다름을 가능한 한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이 서두에서 “진리는 (진리 자체의 힘으로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않는다.”(1항 참조)고 말한 것은 정녕 인권 감수성의 귀감이라고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동성애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가 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찾는 이라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시거나, 몇 년 전 방한하셨을 때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시면서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 역시 복음적 인권 감수성의 빛나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3. 일상적으로 인권을 침해당하고 차별을 겪는 이들은 대부분 여러 부류의 소수자입니다. 이들의 고통은, 차별과 배제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이를 당연시하는 다수자와 기득권층의 무신경한 태도로 더욱 증폭됩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 역시 주변의 주류(로마) 문화에 동화(同化)된 나머지 특정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태동기의 교회야말로 실로 몰이해와 차별을 겪던 소수자의 전형이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첫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는 당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감당하고 참아 주지 못하는 ‘다름’ 때문에 극심한 박해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 자신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기에, 그리스도인 역시 “진영 밖으로 나아가 그분의 치욕을 함께 짊어”(히브 13,12-13)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늘‘이방인이요 나그네’(1베드 2,11 참조)로 생각한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습니다.
4. 이방인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차고 넘칩니다. 예컨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 참조)는 구절은 단 한 군데뿐이지만,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적어도 36 군데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꼭 따라붙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도 역시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탈출 23,9; 레위 19,33-34 등 참조). 유다인들은 국외자, 타국인, 이방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겪어 배워야 했고, 결코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과월절 축제에서 이집트를 탈출하던 그 밤의 상황을 재현하며 기억했던 것입니다.
5. “하느님의 가난한 이(아나윔)”야말로 복음을 가장 먼저, 그리고 깊이 이해하는 이였음은 고대 교부들뿐 아니라 현대 사도좌의 가르침도 거듭 강조했습니다. 예컨대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은 “가난한 이들은 복음의 가장 뛰어난 수용자들이다.”라고 하신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을 비중 있게 인용합니다(48항).
어두운 밤에만 별이 영롱히 보이는 것처럼, 낮고 가난한 자리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접수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비로소 고통받고 차별받는 다른 이의 처지도 눈에 들어옵니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 심정 헤아리듯, 교회도 자기의 이 출발점을 잊지 않을 때 세상에서 쉽게 몰이해와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 되곤 하는 소수자와 ‘경계인’에게서 ‘남’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보고 공명(共鳴)하며 환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이 ‘첫 자리’의 기억을 새로이 하며, 가난한 이를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지를 함께 나누는 ‘가난한 교회’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과 세상의 고통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동시에 알아듣고 이해하는 복음적 명오(明悟)가 열립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만 교회는 끊임없이 쇄신되고 복음화되며, 그리하여 비로소 세상을 복음화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변방으로 나가자.”고 끊임없이 초대하는 것도 바로 이 맥락입니다.
6. 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인권 감각은 “고귀한 것이긴 하나 신앙과는 별개의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인권 감각은 신앙과 지극히 내밀하게 연동(連動)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약자와 소수자를 착취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사람의 인간성과 인권을 해치는 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로 신성(神性)과 신권(神權)에 대한 공격이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나아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다시 말해 소수자요 경계인이라 차별받는 형제자매들을 향한 교회의 우선 선택과 연대는 그저 인간애(人間愛) 차원에서 실천하는 ‘자선(또는 선행)’이기 이전에 신앙 행위 그 자체입니다. 고통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오랜 신앙 감각이었습니다.
7. 형제자매 여러분, 이 땅에는 이미 많은 이주민이 선주민인 우리와 공생(共生)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농어촌 지역의 노동자처럼 열악한 조건 아래 하루하루 고단한 생존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비록 인종과 언어와 문화와 신앙이 다르다 하더라도, 이들 역시 한 하느님에게서 난 우리 형제자매들임을 잊지 말아야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름’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차별과 불이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도록, 올해도 베들레헴의 누추한 여관 짐승 밥통같이 가장 낮은 곳을 골라 강생하시는 구세주께 은총을 청합니다.
2018년 12월 9일 대림 제2주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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