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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17년 전교의 달 복음화위원장 담화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17-10-20 조회수 : 2639

2017년 전교의 달 담화문


‘전교한다’, ‘선교한다’는 말은, 우리 믿음의 원천인 복음 말씀과 관련지어 볼 때, 결국 복음화한다는 말이다. 믿는 우리의 마음속에 복음의 기쁨이 넘쳐흘러 다른 이에게 전해지고, 그 기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전교는 내가 기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복음이 그야말로 내게 기쁜 소리(福音), 기쁜 소식(the good news)일 때 이를 알리고 싶어 환장하는 마음이 전교의 시작일 것이다.


복음 때문에 기뻐 환장한 모습의 첫 원형은 제자들의 반응이었다. 죽었던 스승 예수님의 현존을 부활로 체험한 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그리 환장할 정도로 기뻤다는 걸까. 스승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을 때 젊은 인생을 걸었던 제자들의 희망도 함께 못 박혀 끝난 줄 알았는데, 부활하여 함께 계시니 이제는 그분과 함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로마까지도 접수할 수 있다는 환희 때문이었을까. 만일 기쁨의 원인이 이러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아예 싹도 못 틔웠을 것이다.


오히려 기쁨의 원천을 전혀 딴 곳,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권세의 자리에서 나가 주변부와 끝자리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고대의 위대한 도시 로마의 콧대 높은 지성인들이 푸줏간 일, 시체 처리 같은 군일이나 하고 사는 비천한 유다 출신 그리스도인들한테서 뭘 발견했기에 몇 세기가 지난 후 그리스도교를 그들 국교로 삼기까지 했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빵을 떼어 나눔’(오늘날 미사의 초기 용어)을 보면서였다고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먹고 살기 힘든 하층 노동자 처지에 더 어려운 주위 사람들을 위해 남몰래 갖다 놓는 작은 빵조각. 이것이 로마의 지성인들을 끝내 ‘놀라게’ 했던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빵을 나누는 게 아니라 이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분이 남긴 말씀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깨닫고, 인간 스스로는 결코 수행하기 어려운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또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았으며, 주위에서는 이를 보고 놀라고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 교회의 시작 곧 그리스도교의 출발은 복음의 기쁨을 체득한 이들이 영(靈)에 차서 가만있지 못하고 입이 터져 전해진 것인데, 이 기쁨이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서구 교회 안에서는 그 흔적마저 지워질 형편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는 예외일까.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목숨 바쳐 지켜온 신앙이 200년 남짓 지난 지금 돈과 권력, 이념과 대립의 가시덤불 속에서 차츰 숨이 막혀 그 얼굴에 진정한 복음의 기쁨이 서서히 시들어 가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아직도 얼굴에 기쁨이 빵빵하긴 하는데 그게 자본주의 국물에 푹 적셔진 매우 비복음적인 내용들로 한껏 빵빵해지고 있다. 교회가 마치 어떤 힘 있는 단체인 양,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인 양 착각하며 아직도 고자세를 풀지 못한다. 내심 주위를 의식하며 숨 고르기를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밖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압박에 내부는 고혈압이 되고 급기야 옆구리가 터지고 있다. 그래서 비복음적 비본질적 거짓 형식들이 더욱 설치며 빵빵해지고 진정한 복음의 기쁨은 쭈그러들어 눈만 빼꼼 내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의 이런 모습은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닮아있기에 그러하다. 우리 대한민국은 대단히 죄송하지만, ‘천민자본주의’와 ‘설익은 민주주의’라는 불안정한 텃밭(문화) 위에 눈만 높은 소출(문명)을 외쳐대는 겸손치 못한 정신을 바탕으로 위선과 거짓과 실리가 판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구성원은 모두 한국 사람들이다. 거기서 도망가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우리 겨레가 이런 고달픈 삶의 질곡에서조차 희망을 잃지 않도록 뭔가를 해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지 않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그러셨듯 이웃의 아픔과 이웃의 고통과 이웃의 가난 때문에 맘이 아파 견딜 수 없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이 일이 우리에게 소중한 과업(Aufgabe)이 될 때 언젠가 이웃들이 우리에게 고맙다는 눈길을 보내게 될 것이고 그 눈길이 주는 행복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기쁨에 겨워하게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방한하시어 한국 교회의 이런 실상을 엄하게 지적하셨다. 돈과 권력의 유혹 앞에 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중병을 고치기 위해 무엇보다도 이미 그 병에 걸려 있는 우리 성직자들 수도자들이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했다. 이미 병들어 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복음 말씀을 또박또박 읽으며, 어떻게 해야 나와 우리 한국 교회가 숱한 고통의 나날을 복음의 기쁨으로 살아간 ‘순교자의 얼’을 되찾을 수 있을까 헤아려본다.


첫째, 예수께서 에누리 없이 말씀하셨듯이(마태 20, 24-28), 교회 구성원의 서열은 맨  위가 신자들과 수도자들이고 그 아래에 신부들이 있고 가장 밑바닥에 주교가 엎드려 있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2코린 4장) 신자들 안에 생명(복음의 기쁨)이 약동하게 되는 것은 성직자들의 내면에 (십자가의) 죽음이 약동할 때이다. 주교가 신부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감싸준다면 신부들도 수도자들과 신자들을 사랑으로 감싸 줄 것이다. 간을 빼주고 싶은 심정이 되어야겠다.


둘째, 복음의 기쁨이 입에서 터져 나오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본당사목구 주임과 보좌신부들이 먼저 복음 말씀에 충실해야겠다. 예수님의 아빠 체험을 복음을 따라 추체험하는 과정에서 차츰차츰 하느님 사랑에 맛들이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입에서 터져 나오고 배운 바를 본당 신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게 될 때, 그 본당은 자연스레 ‘말씀으로 살아가는 소공동체’가 될 것이다. 혹시라도 기웃거리는 사이비 말씀종교(신천지)가 다가와도 거기엔 발붙일 자리조차 없을 것이다.


셋째, 맛있는 음식과 멋진 생활로 영적 비만에 걸려 빵빵해진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은 가난한 사람 비천한 형제들과 함께 사는 길 밖에 없다. 그래야 그들 안에서 비로소 잃었던 어린 시절의 단순함과 맑은 영혼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매일매일 성경 말씀을 한 소절이라도 읽고 기도해야하겠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 17,17 참조)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이신 말씀에 순명하며 살아야하겠다. 그래서 복음의 기쁨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내 주위 모든 사람이 그게 좋아 보인다고 그래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참 좋겠다. 아멘.


2017년 10월 전교의 달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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