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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16년 사순 시기 교황 담화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16-02-05 조회수 : 2184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16년 사순 시기 담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희년 여정에서의 자비의 활동


 


1. 복음화 되어 복음화 하는 교회의 모습이신 마리아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에서 저는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이 희년의 사순 시기는 하느님 자비를 기념하고 경험하는 가장 좋은 시기로 우리는 이 시기를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칙서 「자비의 얼굴」, 17항). 하느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라는 호소와 함께 ‘주님을 위한 24시간’ 행사를 권유하면서, 저는 하느님 말씀의 경청, 특히 기도하며 하느님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을 향하여 선포된 말씀으로,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선포를 직접 체험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사순 시기에 자비의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그들이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가까이 계심과 용서의 구체적 표징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을 들으신 마리아께서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신 자비를 예언적으로 노래합니다. 요셉과 약혼하신 나자렛의 처녀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의 완전한 모습이십니다. 처녀이신 마리아께서 잉태하도록 하신 성령의 힘으로 교회는 복음화 되었고 지금도 복음화 되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전통에서 자비는 이미 어원적 차원에서 [히브리어] 라하밈(rahamim)과 헤세드(hesed)와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라하밈은 모태를 뜻하고 헤세드는 혼인 관계와 친척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관대와 충실과 연민이 넘치는 선함을 뜻합니다.


2.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계약인 자비의 역사


하느님 자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의 역사에서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자비로 충만하시고, 깊은 온유와 연민으로 당신 백성을 대하실 준비가 늘 되어 계십니다. 특히 백성의 불충으로 계약 관계가 깨어져 정의와 진리로 더욱 견고한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할 때에 그러하십니다. 여기에 참으로 놀라운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배신당한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을 하시고, 이스라엘은 불충한 자녀와 아내의 역할을 합니다. 호세아서에 볼 수 있는 것처럼(호세1-2 참조), 이러한 가정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당신 백성과 유대를 맺고자 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랑 이야기는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께 당신의 한없는 자비를 쏟아 부어 주시어 그 아드님께서 강생하신 자비가 되시게 하셨습니다(「자비의 얼굴」, 8항 참조).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이스라엘의 온전한 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셔마(Shema)로 모든 유다인에게 요청되는 하느님께 온전히 귀 기울이는 것을 체현하십니다. 이 셔마는 오늘날에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신부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는 신랑이시며 영원한 혼인으로 가시화되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당신 신부와 결합되십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들의 케리그마(kerygma)의 살아있는 핵심이며, 그 안에서 하느님 자비는 중심적인 근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36항)이며, 첫 선포인 것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가 거듭 들어야 하는 것이고, 교리 교육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모든 단계와 시기에 언제나 우리가 거듭 선포하여야 하는 것”(「복음의 기쁨」, 164항)입니다. 자비는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하는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자비의 얼굴」, 21항).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죄인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저질러 당신을 등지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에게조차도 다가가시고자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당신 신부의 완고한 마음을 달래고자 하십니다.


3. 자비의 활동


하느님 자비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 자비는 인간이 충실한 사랑의 경험을 통하여 자비로워질 수 있도록 합니다. 하느님 자비가 우리 저마다의 삶을 비추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의 전통에서 자비의 영적 육체적 활동이라고 불리는 것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도록 힘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기적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 이웃을 육체적 영적으로 도와주고자 하는 일상의 구체적 활동으로 신앙이 드러나는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고, 찾아가 주며, 위로해 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로 나중에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비의 육체적 영적 활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는 가난이라는 비참함에 무뎌진 우리의 양심을 다시 일깨워 주고, 또한 복음의 핵심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자비의 얼굴」, 15항). 그리스도의 몸이 가난한 이들 안에 있기에, “고문당한 이들, 상처 입은 이들, 채찍질 당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과 난민들의 몸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알아보고 만지며 정성껏 돌보아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15항). 흠 없는 어린양의 수난이 역사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기막힌 신비입니다. 이는 거저 주시는 사랑의 불타는 떨기로 우리는 그 앞에서 모세와 같이 신을 벗을 수밖에 없습니다(탈출 3,5 참조). 가난한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으로 고통을 받는 우리의 형제자매일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죽음만큼 강한 이러한 사랑 앞에서는(아가 8,6 참조),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가 가장 가난합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라고 여기지만 사실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입니다. 이는 그가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죄로 그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또한 불쌍한 거지일 뿐이라는 깊은 의식을 억누르는 데에 이용합니다. 그의 권력과 부가 크면 클수록, 이러한 무분별한 기만도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문 앞에서 구걸하는 라자로를 알아보지 않으려고 하는 지경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루카 16,20-21 참조). 그런데 가난한 라자로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의 회개를 간절히 바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만 우리가 어쩌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회개의 기회입니다. 이러한 무분별함에는 종종 우리가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오만한 망상이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악마적인 “너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창세 3,5 참조)라는 생각이 사악한 방식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망상은 20세기의 전체주의 체제들과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와 과학기술의 이념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정치적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무의미한 존재로 여기고 인간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시켜 버립니다. 이러한 망상은 또한 배금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그릇된 발전 모델에 관련되는 죄의 구조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는 부유한 개인과 사회가 가난한 이들의 미래에 무관심해지도록 하여 그들이 문을 닫아걸고 가난한 이들을 보는 것조차 거부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이 희년의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자비의 활동을 실천하여 우리의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육체적 활동을 통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찾아 주어야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만집니다. 또한 우리는 조언, 교육, 용서, 권고, 기도와 같은 자비의 영적 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자비의 이러한 육체적 활동과 영적 활동은 결코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가난을 통하여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만지며 자신도 불쌍한 거지임을 자각하는 은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에 나온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도 이 길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품에 안기고 과분한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이들을 위해서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과 권력과 부라는 우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무한한 행복과 사랑에 대한 갈망은 오직 이러한 사랑으로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과 권력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의 문을 끝까지 열지 않으면 결국 그에 대한 심판을 받아 영원한 고독의 심연이라는 지옥에 빠지게 될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다음과 같은 간절한 말은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그러한 주의 깊은 경청을 통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신랑의, 죄와 죽음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기념할 준비를 매우 잘하게 될 것입니다. 신랑께서는 당신이 오시기를 바라는 당신의 신부를 깨끗하게 하여 주고자 하십니다.


회개하기에 매우 좋은 이 사순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거저 주어진 하느님 자비의 위대함을 접하시고는 당신의 비천함을 가장 먼저 깨달으시고(루카 1,48 참조) 당신을 주님의 겸손한 종이라고 하신(루카 1,38 참조) 동정 마리아의 어머니다운 전구를 통하여 이를 간청합니다.

 

바티칸에서
2015년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프란치스코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for Lent “I desire mercy, and not sacrifice” (Mt 9,13). The work of mercy on the road of the Jubilee, 2015.10.4.,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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