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교우 여러분께 가득하기를 빕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서 40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닌 고통과 절망으로 힘겨워하는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절망과 상처 속에서 슬퍼하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께서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셨던 2000년 전, 이스라엘은 거대 로마제국의 통치로 인해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적으로 억눌린 참담하고 암울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억압된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0년간 기다려왔던 메시아의 도래, 메시아께서 곧 오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갈망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20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그 당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현대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현상과 다양한 통계지표들을 보면 더욱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하루 평균 40명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포기하고(자살률 세계 1위) 있습니다. 자녀의 보육, 특히 사교육비 부담으로 인해 자녀 출산을 포기하는 수많은 젊은 부부들(합계출산율 OECD 최하위)이 가슴 아파합니다. 저출산에 따른 생산 인구의 감소는 급격한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연령, 총인구의 20%)를 초래하여 국민의 경제적 부담이 급속도로 증가해 나갈 것이라는 전문기관들의 암담한 전망은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합니다. 또 실직과 실업률이 계속하여 상승하고 있고, 취업난에 시달리는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는 정체성의 혼란과 불안한 미래, 그리고 경제적인 부담을 체감하는 젊은 청년들의 결혼 및 가정생활의 포기로 이어져 건강한 가정형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으며, 결국 빈곤한 독거노인층의 확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사회를 유지하는 기초인 가정이 해체되고, 그 형성까지도 무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연초 경주 리조트 붕괴사건을 시작으로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세월호’ 대참사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현세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 시대의 부정하고 비윤리적인 모습들을 총체적으로 목격하게 되어, 온 국민은 분노하였고 여전히 깊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진정 우리가 사는 현재의 모습은 2000년 전 구세주께서 태어나실 당시의 상실과 절망의 이스라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과거에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로운 위로가 필요합니다. 2000년 전 절망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선사했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위로가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위로와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으로 감사하게도 깊은 상실의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방문은 우리나라 전 국민에게 크나큰 위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진한 인간애와 위로를 마주하며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시는 교황님의 모습을 보는 이들은 한 인간의 위로를 넘어선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온몸으로 체감하였습니다.
교황님이 위로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아오신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더욱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사야의 예언대로(이사 7,14),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일러준 그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마태 1,23)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시어(필리 2,7)” 우리의 아픔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고, 고통과 억압받는 이들을 포용하기 위해 몸소 수난과 박해를 받으셨으며, 억울하게 상처받는 이들을 감싸주기 위해 기꺼이 배신당하셨고 모욕적인 죽임을 맞이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와 함께하시고 또 우리와 똑같은 처지가 되셨기에 진정 우리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 되신 그분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갈라 2,15-21). 그 믿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당시 ‘참 위로’이신 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 그 위로가 가져다준 기쁨과 평화를 받아 누린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추운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동들과 멀리서 당신을 찾아온 동방박사들, 성전에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기다리던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만이 그분을 알아 뵙고 경배하였을 따름입니다.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으로 다시 이 땅에 오셨지만, 이미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도,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요한 1,11 참조).
그러므로 이제 참된 위로를 주시기 위해 다시 우리 가운데 오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세상에 빼앗긴 평화와 온정의 마음을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 마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2000년 전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고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던 바로 그곳,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 머무는 자리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외면한다면 오늘 그들 가운데에 탄생하신 구세주 메시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가난하고 상처 입은 이들의 궁핍함을 못 본 체하고 외면한다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더 아프고 더 상처받고 더 힘겨워하는 이들을 전폭적으로 끌어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비천하게 오신 구세주 예수님은 지금 곤궁한 이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가난한 이웃과의 소통
소통은 친교에 이르는 기본적 조건으로서 그 완전한 모델은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짐승의 처소인 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의 원형이고, 우리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사랑의 친교를 넓혀가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주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다가서고 낮추며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아드님을 인류의 행복과 해방을 위해 내어주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중재자이신 성모님
우리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항상 중재자로 계신 성모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고서는 즉시 놀랍게 도움을 베푸셨습니다(요한 2,1-11). 가난한 이들을 위해 주님께 전구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위로의 중재자’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증표로 예수님의 첫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삶을 본받아 ‘위로의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탄생의 기쁨과 평화를 품에 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며, 이들을 위해 주님께 온몸과 마음으로 기도하며 선행을 베푸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을 닮으려고 애쓰며 수고하는 우리들을 성모님께서 친히 당신 품에 안아 주님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4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