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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신유박해(辛酉迫害) 200주년 (한국 가톨릭 대사전 내용 중에서)

작성자 : 수원교구 작성일 : 2001-03-04 조회수 : 1358
1801년(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1800년 (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 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두를 이어 순조(純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일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대왕대비는 원래가 노록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건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時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상(國喪)으로 즉시 박해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국상이 끝난 지 얼마 안되어 즉 그 해 12월 17일 (음)에 중인(中人) 최필공(崔必恭)이 다시 구속되고 [이하 날짜는 음력] 그의 사촌동생인 필제(必悌)가 잡혔다. 이어 정초에는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崔昌顯)을 위시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잡혀, 포청은 잡힌 사람들로 가득찼었다. 이어 정월 10일 (음)에는 공식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케 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리었다. 엄명을 내린 지 9일 만인 19일(음) 명도회장 (明道會長) 정약종(丁若鐘)의 책고리짝이 발가되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 박해를 피해 서울로 이사왔던 정약종은 신변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편지등을 담은 책고리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박가된 것이었다. 이에 천주교를 엄단하라는 상소문이 연달아 올라와, 마침내 2월 9일 (음) 이가환(李家煥), 홍낙민(洪樂敏),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을 잡아다가 국문(鞠問)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鐘)도 잡혀 의금부에 갇히었다.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인 동시에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 (음) 시작하여 26일 (음) 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그들 중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박해는 지방으로 화산되어, 충청도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이 2월 9일(음) 공주(公州)옥에 갇히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2월 26일(음)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이틀 뒤 공주로 다시 이송되어 참수로 집행되었다. 여주(驪州)와 양근의 천주교인들은 전년도에 이미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들의 결안((結案)이 확정된 후 각기 본고향으로 보내 사형에 처하여 일반 대중을 경고케 하였다. 이리하여 3월 13일(음) 여주 성문밖에서 5명이 순교하였는데, 그들은 원경도(元景道), 임희영(任喜永), 최창주(崔昌周), 이중배(李中培), 정종호(鄭宗浩) 등이다. 양근에서도 같은 무렵에 10여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순교자는 유한숙(兪汗淑)과 윤유오(尹有五)였다. 4월 2일(음)에는 또다시 6명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약종의 아들 철상(哲祥)과 최필공의 사촌인 필제(必 )와 중인 정인혁(鄭仁赫), 그리고 여교우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와 이합규(李 逵) 등이었다. 2월말 (음) 남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참수 도는 옥사, 유배됨으로써 끝날 것으로 보였던 박해는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가열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주로 강완숙(姜完淑)의 집에 거처하면서 전교에 힘써왔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탐지하고 덮쳤으나 미리 이를 알아차린 주신부는 다른곳으로 피하여 체포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도피로 집 주인 강완숙 일가와 많은 교우들이 잡혀 들어가자, 주신부는 자기로 인하여 많은 교우들이 고통을 받게 됨을 알고 자수키로 결심하게 되었다. 주신부에 대한 국문으로 이희영(李喜英), 김이백(金履白), 김건순(金健淳), 강이천(姜彛天) 등 9명이 잡히었으며, 주신부를 한때 궁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례받은 일이 드러나, 은언국(恩彦君) 이인(李 )의 처 송씨(宋氏)와 그의 자부(子婦) 신씨(申氏)에게는 사약(賜藥)이 내려졌고, 그 여파로 강화(江華)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 자신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주신부는 4월 19일(음) 군문효수(軍門梟首)되고, 그 이튿날에는 김건순, 이희영 등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주신부를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도 2월 24일(음) 아들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잡혀 궁녀 강경복(姜景福), 전 궁녀 문영인(文榮仁), 최인철(崔仁喆), 김현우(金顯禹) 등 8명이 5월 24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함께 사형언도를 받은 고광성(高光晟), 이국승(李國昇), 윤점혜(尹占惠), 정순매(鄭順每) 등 4명은 각기 고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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