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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가톨릭신문 기획_ 순례, 걷고 기도하고 (1) 수원교구 은이·골배마실 성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1-03 조회수 : 360

함박눈 내려앉아 눈꽃 핀 골짜기… 김대건 성인도 이 길을 걸었다

산 속 교우촌 은이에서 신학생으로 선발
9년 만에 귀국해 첫 사목활동 펼친 곳도 은이



함박눈 내린 은이성지 전경.


함박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차 한 대 겨우 드나들 작은 길을 따라 닿은 한적한 터. 우뚝 선 큰 바위에 새겨진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은이(隱里). 언덕에 가려 숨은 동네라는 한자를 머리에 새기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름 그대로다. 골짜기에 걸터앉아 한숨 돌린 안개가 막 걷히자, 눈꽃 핀 골짜기를 좌우 병풍 삼은 성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은이성지의 아침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소년 안드레아, 부르심을 받다

지금이야 영동고속도로 양지 나들목을 나와 차로 10분이면 닿을 거리지만, 박해시기 이곳은 용인의 교우촌 중 하나였다. 이름 그대로 숨은 동네였고 박해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에 공소가 자리할 수 있었다. 이곳 은이에서 소년 김대건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성지 마당. 세례를 받는 소년 김대건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 아래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교우촌 후손들의 증언으로 찾은 은이공소 터다.
1836년 4월. 은이와 지척인 골배마실에 살던 15살 소년 김대건의 꿈이 이뤄졌다.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이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한 것이다.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소년에겐 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심. 성소의 은총이었다. 김대건은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조선교회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교회를 대표한다는 것, 그리고 성직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 기쁘면서도 외로웠을 것이고 감사하면서도 두려웠을 것이다. 약관에도 미치지 않은 어린 소년의 어깨는 무거웠을 것이다.

그 마음 살펴 새기며 몇 걸음 옮겨 성당 앞에 섰다. 김가항(金家巷)성당은 부제 김대건이 1845년 8월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의 원형을 최대한 살렸다. 제대 근처의 기둥 4개와 대들보 2개, 동자기둥(들보 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 1개는 철거 당시 성당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눈 내린 겨울 풍경과 성당의 흰색 외벽이 조화를 이룬다.


사제 안드레아, 조선 땅을 다시 밟다

은이는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의 처음이자 유일한 사목 장소다. 신학생으로 발탁돼 떠난 지 9년 만인 1845년 10월 신학생이 아닌 성직자로 조선 땅을 밟은 김대건 신부는 1846년 4월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에 나선다.

은석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 미리내,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그리고 한양까지.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든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 깊은 밤을 기다려 길을 나섰다. 교우 집에 가서는 깨끗한 종이를 정성껏 벽에 붙이고 십자가를 모셨다. 하느님을 초대하고 성사를 베풀었다. 은이에서의 사목 기간은 대부분 겨울. 얼마나 춥고 고된 길이었을까. 하지만 목자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울 신자들을 생각하면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교우촌을 돌고 은이로 돌아올 때면 하얗게 날이 샜다.


성지 마당 김대건 신부 성상과 기념각.


목자 안드레아, 천국에서의 재회를 약속하다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막 끝났다. 178년 전인 1846년 4월에도 이곳에서 미사가 봉헌됐다. 은이를 떠나는 날. 김대건 신부가 이별을 아쉬워하는 교우들에게 당부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분이 잘 돌보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천국에서 즐거이 다시 만나자는 목자의 말은 그대로 유언(遺言)이 됐다. 그해 9월 새남터에서 목자는 천국으로 향했다.

성지 밖 커다란 이정표가 신덕(信德)고개로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발해 신덕, 망덕(望德), 애덕(愛德) 고개를 넘어 미리내로 향하는 10.3㎞ 길은 김대건 신부가 은이에서 사목할 때 거닐던 길이자 순교한 그의 유해가 거쳐 간 길이다. 지금은 ‘청년 김대건 길’로 불리며 많은 순례자가 걷고 기도하며 순교성인의 자취를 묵상하고 있다.
※주일·평일미사: 오전 11시(월요일 미사 없음)
※순례문의: 031-338-1702, www.euni.kr


■ 순례 길잡이

김가항성당 곁 김대건 기념관에서 성인의 생애와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탄생과 성장, 서품, 입국, 사목, 순교에 이르는 장면과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한국·중국·필리핀에 걸친 성인의 활동 여정도 살펴볼 수 있다. 김가항성당 복원과정 소개 자료와 은이공소와 인근 양지성당에서 사용했던 유물과 오래된 교회서적도 있다. 1961년 골배마실성지 조성 당시 야외제대에 설치됐던 부조도 최근 기념관에 전시됐다. 소년 김대건이 살았던 골배마실의 아담한 초가를 배경으로 절구질하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올 6월 성지 마당에 들어선 김대건 기념각은 1947년 성지 인근 벌터에 자리했던 남곡리성당(현 양지본당)의 기념경당을 복원, 재현한 것이다. 기념각 내부 제대 위에는 성지 옛 성당 종탑에 있던 김대건 성인상을 모셨다. 올해부터 기념각을 중심으로 순례자들을 위한 야외 미사도 봉헌될 예정이다.

은이 순례 전후 꼭 들러야 할 성지는 골배마실이다. 은이성지에서 차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소년 김대건이 세례 전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심을 다졌던 곳이고, 사제품 후 귀국해 모친인 고 우르술라와 함께 머물며 몇 달 동안 사목한 자리다. 1961년 성지로 조성되기 전부터 이곳은 김대건 신부 집터로 지역의 교우들에게 구전돼 왔다. 마을 주민들은 가족이 아프거나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이곳을 찾아 기도를 봉헌했다고 전해진다. 성지에는 김대건 신부 청동상과 생가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성인이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의 원형을 최대한 살린 은이성지 성당 내부.


성인의 일대기와 유물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김대건 기념관.


골배마실 성지.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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