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와 순례길_ 청년 김대건 길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5일 봉헌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의 복음 내용 중 일부다. 한국 교회의 첫 사제이자 순교자 성 김대건 신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말씀이다.
이날 김대건 신부의 순교 정신을 기억하며 수원교구 은이성지부터 미리내성지까지 이어지는 ‘청년 김대건 길’을 걸었다. 2020년 조성된 청년 김대건 길은 이듬해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아 용인시가 순례자를 위해 정비사업을 펼쳐 마련한 순례길이다. 성인 사제의 삶과 믿음이 서린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이 다녀간다.
은이성지, 유년시절 김대건을 기억하며
청년 김대건 길의 출발점은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은이성지다. 은이는 숨겨진 마을, 숨어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이다. 1836년 15세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곳이자,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년 김대건은 이후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연안 김가항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 교회의 첫 사제가 됐다. 수품 후 고국 땅으로 돌아온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 활동 역시 은이를 중심으로 한 용인, 이천, 안성 지역 일대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사제품을 받고 1년도 채 되지 않은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공소에서 교우들과 공식적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당시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입국로 개척을 위해 서울로 떠났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 우리가 살아있게 된다면 또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를 합시다.”
은이를 떠나기 전 교우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 두 달 후인 6월 5일 인천 앞바다 순위도에서 포졸에게 체포돼 온갖 고초를 당하다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은이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유년시절이 담긴 곳이자 성소의 요람이다. 성소의 꽃을 피운 곳이기도 하다. 성지에는 이를 기리며 그가 사제품을 받은 김가항성당이 복원돼 있고, 건너편에는 순례자를 위한 기도의 숲도 조성돼 있다. 차로 10분 거리에 김대건 신부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성지가 있다.
청년 김대건의 길을 걷다
‘청년 김대건 길’은 은이성지에서 출발해 삼덕고개를 넘어 미리내성지까지 총 10.3㎞로, 김대건 신부가 박해를 피해 험한 산길을 다니며 사목적 열정을 불태우던 활동로로 알려져 있다. 김대건 신부의 얼과 함께 울창한 숲과 시원한 계곡이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다. 순례길 군데군데 김대건 신부의 글귀와 동상이 설치돼 있어 한국 교회 첫 사제의 열정과 순교 정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청년 김대건 길에는 또 한명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해 미리내성지까지 이장한 이민식(빈첸시오, 1828~1921)이다. 당시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은 포졸들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가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0월 26일 새남터 백사장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그는 시신을 안고 산길로 150여 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미리내에 도착했다. 그가 걸은 길 중 일부가 바로 이 길이다.
신덕, 망덕, 애덕고개로 이어지는 삼덕고개는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시신을 이고 지고, 숨어서 걸어간 이민식의 노고를 느끼며, 절로 신앙을 성찰하게 만드는 통한의 길이다. 애덕고개에는 이민식이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내용도 새겨져 있다.
미리내성지, “벗들아 천국에서 만나자”
애덕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청년 김대건 길의 종착지인 안성 미리내성지가 맞이한다.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이민식에 의해 안장되면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다. 본래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때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궈 살던 곳으로, 밤이면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라고 불리게 됐다. 은하수의 우리말이 미리내다. 실제로 각종 야생화와 온갖 생물들이 서식하는 드넓은 자연림으로 조성된 미리내성지를 걷다보면 이름의 의미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청년 김대건 길은 성지 입구와 정반대 편에 있는 끝 길과 연결돼 있어, 그 종착점에서 바로 김대건 신부 묘소를 볼 수 있다. 묘소는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 앞에 마련돼 있고, 그 옆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미리내본당 초대 주임이자 한국 교회의 세 번째 사제 강도영 신부, 그리고 미리내본당 3대 주임 최문식 신부의 묘소도 함께 있다. 김대건 신부 묘역 위쪽에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묘소와 이민식의 묘소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기념성당 내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발 뼈와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분이 안치돼 있다.
성지 입구 쪽으로 가다보면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조성돼 있어 순례의 마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중간에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 있고, 성당 제대에 김대건 신부의 종아리 뼈가 모셔져 있다. 이외에도 성 이윤일(요한)의 묘소 유지와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도 있는 한국 교회의 깊은 유서가 담긴 곳이다.
“천국에서 만납시다”라는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말처럼, 청년 김대건 길을 걷다보면 수많은 벗들이 천국에서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외침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지상의 순례길에서도 수많은 벗들이 뒤따르고 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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