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그리스도교 신자 하나되어 이뤄가는 친교와 참여·사명의 장
‘시노드’에서 ‘시노달리타스’ 유래
‘함께(Syn) 길(Hodos)을 걷는다’는 뜻
‘시노드적 성격’ 정도로 직역 가능
주교단 회의를 의미했던 ‘시노드’
합의 이뤘던 주교단 문화 그대로
모든 신자 참여해 교회쇄신 하자는 것
시노달리타스와 민주주의
그러나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성경과 교부를 비롯한 역사적 전통에 근거한 것이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관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출현했다.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성원들의 교계적 위계를 강조했으나 현대에 와서 자연법에 근거한 인간 존엄과 민주주의 공동체관이 보편화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임을 강조하며 현대성과 대화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바뀐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대한 교회적 쇄신과 강조의 방향성이 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언뜻 시노달리타스는 민주주의 세계관과 규범을 염두에 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물론 민주주의 세계관의 교회를 향한 변화의 압박에 교회가 직면한 것도 사실이다. 민주주의적 세계관이 갖는 부분적 내용들을 교회 쇄신에 참조할 수 있지만, 그 둘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민주화, 다수결의 원리, 권력이나 직무를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받는 것 등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시노달리타스는 이런 정치 이데올로기의 속성을 존중하고 고려하지만, 근원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진리와 복음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되고 완전한 것은 하느님 한 분뿐이고, 교회를 통해 그분 진리가 전승돼왔다고 믿는다. 민주주의가 가진 이상 즉 인간의 고귀함과 이타자적 의지의 형상은 교회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불완전한 사회체일 수 있지만, 교회는 하느님 영에 대한 경외와 식별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궤적을 그려왔다. 교회는 민주주의적 세계관의 한계에 대해 오히려 도움과 영감을 줄 수 있다.
교회가 민주주의와 시노달리타스 사이에 차이를 두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민주주의의 원리는 공화주의의 원리로서, 다수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희생자 혹은 배제자 집단의 발생을 인정한다. 둘째 교회 목적은 개인과 공동체 자체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구현과 주님의 사명을 완성한다는 것에 있다.
교회쇄신의 도구인 시노달리타스 정신
한편 시노달리타스의 목적은 세상을 향한 복음적 헌신을 위한 교회쇄신에 있다. 세상을 향한 복음적 헌신과 쇄신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예컨대 교회적 시노달리타스가 민주주의 세계관에 줄 수 있는 영감은 특정 집단을 위한 가치 주관적인 한계를 넘어 참된 가치를 향한 성찰적 합의로의 초대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민주주의적 결정은 특정 민족, 정치공동체, 집단들의 이익과 효율성을 위한 주관적 가치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또한 시노달리타스는 오늘날 개인주의의 강화와 다원주의라는 시대성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대안적 규율체계이기도 하다. 즉 시노달리타스는 고립된 개인의 폐쇄적 울타리를 넘어 공동체적 관심과 친교로 초대하는 것이고 다원주의가 가져오는 거짓된 문화에 대한 참된 식별로의 초대이다.
변화하는 사회의 환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고, 그분의 복음을 알리고, 그 가치를 증거하고, 봉사하는 교회의 소명이 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변화해야 한다. 그 변화는 세상의 가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변화를 성찰하고 식별하면서 쇄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쇄신의 도구가 바로 시노달리타스의 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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