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에도 굳건히 지켜낸 신앙의 향기 머금은 골짜기
오메트르·도리·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이 언어·풍습 익히며 현지 적응·선교 준비 돕던 곳
‘순교자들의 길’ 7처 마련 ‘눈길’
손골성지 전경. 이곳에서 여러 프랑스 선교사들이 언어와 풍습 등을 익히며 선교를 준비했다.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있는 광교산 기슭의 손골성지(전담 이건희 신부)는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성 도리(Dorie, 김 헨리코, 1839~1866) 신부와 성 오메트르(Aumaitre, 오 베드로, 1837~1866) 신부를 특별히 기념한다. 또 박해시대 손골 교우촌에서 살았던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기억한다.
손골은 예로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해 ‘향기로운 골짜기’라 했던 손곡(蓀谷)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그런 내력 속에서 지금은 굳건하게 지켜낸 신앙의 향기를 뿜어내는 장소로 신자들을 맞는다.
성지는 박해시대 교우촌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교우촌이 있지만, 이곳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언어와 풍습 등을 익힌 장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면 안전한 곳에서 조선 생활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살아갈 준비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을 찾아야 했다. 손골은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곳이다.
신자들은 박해가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도 선교사들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선교 준비를 하도록 도왔다. 1857년부터 1866년까지 오메트르, 도리, 페롱, 조안노, 칼레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머무르며 적응 기간을 거쳤다. 최양업 신부와 다른 선교사들도 손골을 찾아 머물렀다. 또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손골을 방문해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갔다. 그만큼 손골은 선교사들의 자취와 숨결이 깃든 곳이다.
손골은 한편 신자들을 사목하고 선교하는 면에서도 중요한 거점이었고 경기도 지역 사목의 축이었다. 손골에서 미리내로 옮겨간 오메트르 신부 경우처럼 선교사들은 손골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을 사목하다가 떠나서 미리내를 중심으로 사목하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 신자들을 만났다.
1866년 2월 27일 오후 1시경 체포돼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는 한국에 있던 8개월 대부분을 이곳에서 지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교우촌 신자들을 모두 떠나게 한 뒤 홀로 남아 있다가 체포됐다. 33개월의 한국 생활 중 절반을 손골에서 머물렀던 오메트르 신부는 도리 신부 순교 후인 3월 11일 충남 거더리에서 자수한 후 체포돼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손골 출신 신자 중에서도 여러 순교자가 나왔다. 이 요한과 그의 아들 이 베드로, 손자 이 프란치스코 등 삼대(三代)가 순교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처럼 성지는 박해시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발자취와 말씀, 신자들의 사랑과 교회에 대한 애정이 서려 있는 현장이다. 목자들의 사목을 도우며 봉사한 신앙 선조들의 모범과 실천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지는 또한 선교사들이 이어준 한국과 프랑스 교회의 인연도 생각하게 한다. 코로나19로 입장이 제한되고 있지만, ‘손골기념관’에는 선교사들의 노고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도리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 3통을 비롯해 1865년 10월 16일 손골에서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원본이 보관돼 있다.
여기에는 오메트르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 3통도 있다. 특히 1862년 6월 15일 첫 미사를 봉헌하고 부친에게 보낸 상본과 그 뒷면에 쓴 편지가 눈에 띈다. 유품들은 대부분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가 태어난 프랑스 뤼송교구와 앙굴렘교구에서 기증한 것들이다.
성지 개발도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성인의 프랑스 고향 본당에서 전달한 돌 십자가가 계기였다. 도리 신부 부친이 사용하던 맷돌로 두 개의 십자가를 만들어 하나는 생가에 놓고, 다른 하나를 보내온 것이었다. 이에 손골은 도리 신부 순교 현양비를 세워 꼭대기에 그 십자가를 올렸다. 이후 성지는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성당 지하 ‘순교자들의 방’에서는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도리 신부와 김대건 신부 등 양국 성인의 유해와 손골 무명 순교자 유해를 마주할 수 있다. 성당 뒤쪽 언덕에 조성된 무명 순교자 묘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손골 출신 신자 네 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선교사들을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하던 평신도들의 열성이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 익혔던 선교 정신은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순교로 이어졌을 것이다.
성당 옆 마당 ‘순교자들의 길’은 손골성지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도 장소다. 7처로 마련된 길에서는 도리 신부, 오메트르 신부, 무명 순교자 등 성지가 현양하는 순교자들과 한국교회 성인들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다.
이건희 신부는 “손골은 신앙을 증거하러 오셨던 선교사들이 머물던 울림이 남아있는 곳”이라며 “우리가 듣고 알고 품어야 할 하느님 말씀이 선포되었던 곳임을 기억하고, 그것을 찾고 듣고자 노력하는 마음으로 순례할 때 희년의 뜻이 더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의 031-263-1242 손골성지 사무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가톨릭신자 2021-06-13 [제3249호,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