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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교황청이 있었기에…신생 대한민국 가장 먼저 승인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9-15 조회수 : 630


○ 방송 : CPBC 뉴스
○ 진행 : 이혜은 앵커
○ 출연 : 이민석  /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앵커] 올해는 대한민국과 교황청이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한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가을 학기 공개대학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대한민국과 교황청을 주제로 발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이민석 선임연구원 스튜디오에 모시고 반세기가 넘는 동행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 안녕하십니까.

▷ 한국과 교황청이 수교한 지 올해로 꼭 60년이 되는데요. 교황청이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교황사절을 파견한 건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교황청은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한국천주교회에 처음으로 교황사절을 파견하였습니다. 한데 한국에 직접 파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에 교황사절을 파견하고, 한국천주교회의 교황사절까지 겸임케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 광복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총회로부터 승인을 받기까지 훗날 주교가 되는 초대 교황사절 패트릭 번 몬시뇰의 역할이 컸다고 하던데요. 어떤 활동을 했는지요?

▶ 교황청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 7월 패트릭 번 몬시뇰을 교황사절로 파견하였습니다. 패트릭 번 몬시뇰은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평양지목구와 교토지목구 초대 지목구장을 역임한 분이었습니다. 패트릭 번은 초대 교황사절로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후에는 대한민국이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당시 교황청의 관심과 지원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특히 당시 교황의 역할을 빼놓을 수는 없겠죠?

▶ 좀 전에 말씀드린 바대로 교황청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한국에 1947년 교황사절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한국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독립국가로 승인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정부 수립 과정과 수립 이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청의 관심과 지원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유엔으로부터의 합법정부 승인의 과정은 더욱 힘들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 1948년 9월 파리 유엔총회 대표단을 이끌었던 인물이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 박사였던 걸로 아는데요. 천주교 신자인 각국 외교관들로부터 받은 도움이 컸다고 볼 수 있을까요? 

▶ 교황 비오 12세가 1947년 교황사절을 대한민국에 파견한 분입니다. 교황 비오 12세의 교황사절 파견은 교황청이 대한민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것으로 이해되어, 대한민국이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얻는 과정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도 교황청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교황청 국무장관 몬티니 대주교(훗날의 성 바오로 6세 교황)와 주프랑스 교황대사 론칼리 대주교(훗날 성 요한 23세)가 유엔 한국 대표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비오 12세 교황이 내린 지시였다. 덕분에 수석대표 장면(요한) 박사는 한국이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받는 쾌거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에서 승인을 받은 후 1948년 12월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감사 미사가 봉헌됐다고 하던데요. 그 날의 기록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요? 

▶ 네, 장면 박사는 일제를 거쳐 해방 후 어쩌면 유일무이한 천주교 출신 정치지도자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받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계기는 교황청 국무장관 몬티니 대주교(훗날의 성 바오로 6세 교황)와 주프랑스 교황대사 론칼리 대주교(훗날 성 요한 23세)가 장면 박사가 이끄는 유엔 한국 대표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 1963년에 대한민국과 교황청이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는지, 그 발자취를 살펴보면 어떤가요? 

▶ 먼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날, 노기남 주교는 15일부터 20일까지 독립 선포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948년 12월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유엔에서 대힌민국 정부를 승인하자 명동대성당에서 한국 유엔승인 감사 강복제를 거행하며 한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고 평하고 한국천주교회 수호성인인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 끝으로 대한민국과 교황청 수교 60주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 교황사절 파견으로 유지된 대한민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1963년 공사급 외교 사절 교환을 합의하고 정식 외교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주한 교황사절 델 주디체 대주교가 초대 주한 교황공사로 승격하였습니다. 3년 뒤인 1966년에는 양국 관계가 대사급으로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교 이후 대한민국과 교황청은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 평화 유지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 한국교회사연구소 이민석 선임연구원과 말씀 나눠봤습니다.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윤재선 기자 cpbc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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